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동산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신(金英信) 원장은 재일동포 출신 한의사다.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와세다(早稻田)실업학교를 거쳐 다쿠쇼쿠(拓植)대 경영과를 졸업했다. 와세다실업학교는 일본 최고사립학교 중 한 곳으로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오 사다하루(王貞治)의 모교로 유명하다. 국내 인사로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이 학교를 나왔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부모의 나라인 한국을 찾은 김 원장은 우연한 기회에 한의학에 매료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김 원장은 한국으로 건너와 경영학과에 입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하나의 우주로 보며 근본적인 치료에 임하는 한의학의 매력에 빠지면서 한의사로 진로를 바꿨다.

그에게 있어 일본이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한 나라라면, 한국에서는 인생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그런 면에서 두 나라 모두 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가 국제동양의학회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동아시아 의학의 큰 줄기를 두루 경험한 이력 때문이다.

- 김영신 원장은 재일동포 출신 한의사로 국제동양의학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 김영신 원장은 재일동포 출신 한의사로 국제동양의학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한의사제 폐지한 일제 정책, 한·양방 갈등 시작
동양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재일동포 출신 한의사답게 김 원장은 객관적이면서 분명하게 설명했다.

“두 나라는 우선 제도 차이가 분명합니다. 한국은 한의학이라는 절대적인 학문 영역에서 공부한 한의사가 있고 일반 양의사가 있다면, 일본은 한·양방 간 구분 없이 의사라는 하나의 직종에 모든 것이 통합돼 있습니다.”

김 원장의 설명처럼 우리와는 달리 일본은 한의사라는 직업군이 없다. 김 원장에 따르면, 에도(江戶)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일본 두 나라는 의학의 뿌리가 같았다. 동의보감이 출간되기 전까지 한의학과 일본의학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에도 시대 활약한 요시마스 도도(吉益東洞·1702〜73)에 의해 일본 의학은 복치(腹治)의학 쪽으로 흘러갔다. 요시마스 도도는 일본식으로 상한론(傷寒論)을 해석한 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세밀함을 더해 복치의학을 집대성했다. 이후 메이지(明治)유신에 이르러 일본 정부는 전통을 연구하는 일본의학을 양학 아래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이후 일본의학은 오늘 날과 같이 서양의학 아래 있는 구조가 됐다. 오늘날까지 일본 의학이 동아시아 의학계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뤄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8월15일 광복 70주년은 그에게도 뜻 깊은 날이다. 일본은 그에게 있어 고향과 같은 나라이지만 한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과 받아야 할 대상이다.

최근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보면서 그 역시 마음이 아프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한의학 말살정책은 재일동포인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안타까운 역사다. 1910년 일제(日帝)는 강제로 한의사(韓醫師)를 없애고 1913년 ‘한의사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의생제도를 실시했다. 이전까지 과거(科擧)를 통해 의관(醫官)이 된 전의(典醫)뿐만 아니라 일반 한의사(韓醫師)도 예외 없이 의생(醫生)으로 지위가 떨어진 것이다. 김 원장은 “해방 이후 의생제도가 없어지고 한의사가 부활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양방과 한방의 오랜 갈등이 생겨난 것의 시작에는 일본 정부의 한의학 말살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한의학은 겨우 명맥만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 양방으로는 못 고치는 병이 많다는 자성론이 고개를 들면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한방에 양방의 치료기기를 활용하는 통합의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죠. 반대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간단한 엑스(X)-레이 검사기기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 아닌가요. 한방과 양방은 서로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도움이 되는 쪽으로 힘을 합쳐야죠.”

김 원장은 앞으로 한방과 양방이 결합된 통합의학이 중요한 의학적 화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 있어 전통의학 수준은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국, 일본 모두 독자적으로 한의학을 연구하지 못하고 있다.

김 원장이 국제동양의학회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도 동아시아 의학의 부활이 서양의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난 1975년 설립된 국제동양의학회는 한국과 일본, 대만 의료인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국제학회다. 국제동양의학회는 지난 1976년부터 16차례 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38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김 원장은 동양의학에 대해 “인간이 중심이라는 의료철학을 기반으로 삼고 여기에 과학적 치료 방법을 접근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동북공정 등으로 우리 고대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 하는 것처럼 한의학을 자기네 나라 중의학(TCM)의 한 뿌리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중의학의 세계표준화에 목을 매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 여기에 중국의 반대로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대만이 국제동양의학회 활동에 적극 나서는 것도 동아시아 의학은 특정 국가 한 나라가 소유한 학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입니다.”

- 김영신 원장(오른쪽)이 동양의학을 주제로 김남일 학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영신 원장(오른쪽)이 동양의학을 주제로 김남일 학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통합의학 발전 위해 양방 기기 사용 허용해야
동양의학계에서 우리 한의학의 경쟁력은 충분하다는 게 김 원장의 생각이다. 그는 “옛 동아시아 의학의 본류가 남아 있는 의학은 우리 한의학뿐”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인 한의사 제도를 유지해온 덕분에 학문적 수준이 높다. 가령 일본만 해도 환자 치료에 사용되는 약재료가 4~5가지에 불과해 15~20가지를 사용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많다. 중의학의 경우 침(鍼)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의학의 미래가 밝지 않을까. 이에 대해 김 원장은 다소 회의적으로 전망했다. 한의학 경시 풍조가 학문 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한약과 양약을 동시 복용토록 하는 등 한방과 양방을 결합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김 원장에 따르면, 일본 의사의 80% 이상이 한약을 써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비과학적이다’, ‘과학적이다’라는 소모적 논쟁을 이어갈 동안 일본은 꼼꼼한 임상실험을 토대로 동양의학 과학화에서 크게 앞선 상태다.

김 원장은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100년, 200년 이후에는 한방 치료법을 외국에서 배워오거나 관련 제품을 수입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당장의 이익보다는 국가경쟁력 향상 측면에서도 한방과 양방이 손을 잡고 서로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난 두달 사이 한국을 강타한 메르스(중동호흡기질환) 대처에 있어서도 한방과 양방이 힘을 합쳤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거라는 게 김 원장의 생각이다. 지난 2003년 사스(SARS) 창궐 당시 중국 정부가 한방과 양방의 병행 진료를 통해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진료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듬해 세계보건기구(WHO)는 △한의학·양의학 병행치료가 양의학 단독치료보다 좋은 효과를 냈기 때문에 △향후 긴급 공공보건관리 상황 시 한의학적 치료를 병행할 것과 △한의학 관련 연구자 네트워크 확립 및 연구의 지속, 전문인력 양성 등을 권고한 바 있다.

- 김영신 원장은 “우리 몸의 저항력을 높이는 것이 전염병 예방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 김영신 원장은 “우리 몸의 저항력을 높이는 것이 전염병 예방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오래 살되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도시화로 인해 전염병은 점점 내성이 커질 겁니다. 그 때마다 병을 치료할 수는 없지요. 결국 필요한 건 병에 대한 우리 몸의 저항력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실 이번 메르스 사태도 정부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것도 잘못이 크지만,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과민하게 대응한 탓이 더 큽니다. 지나치게 공포를 키운 거죠. WHO도 분명 그렇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별 탈 없이 해결될 거라고요. 이제부터라도 기초체력을 증진시키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한약 등 한방 치료를 통해 몸의 저항력을 키우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죠.”

북한의 경우 일제 강점기까지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의학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공산화 이후 관련 학문이 쇠퇴하면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김 원장은 환자를 꼼꼼하게 진료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문진(問診)을 철저하게 한다.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탓에 환자 증상에 대한 기록도 중요하게 여긴다. 치료 기록부인 차트 정리도 체계적이다.

김 원장은 삶의 질 향상을 가장 중요한 의료철학으로 여긴다. 경우에 따라 치료가 힘들 경우 이를 환자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안 되는 병 치료에 집착하기보다는 질병을 친구 삼아 여생을 즐겁게 보내는 것도 중요한 가치죠. 최근 세계 의학계가 단순한 수명이 아닌 건강 수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삶의 질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외국은 이미 생각이 바뀌고 있거든요.”

 

▒ 김영신 원장은…
1955년 일본 도쿄 출생, 77년 일본 다쿠쇼쿠대 경영과, 84년 경희대 한의과대 졸업, 90년 同 대학교 대학원 한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