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조짐인가, 더블딥(재폭락) 전의 반짝 상승인가. 일본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복잡하다. 단순히 이웃 잘되는 게 배 아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일본 경제 몰락은 같은 동아시아 경제권에 위치한 우리에게도 달가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과 더블딥 중 아직까지는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많다. 그만큼 최근 일본은 주요 경제지표들이 희망적으로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들의 체질 개선이 눈부시다. 엔고 위기를 겪는 동안 일본 기업은 완전히 경쟁력을 회복했다. 현재 선택과 집중을 통한 환골탈태(換骨奪胎)는 일본 기업의 최대 자랑이다. 고령사회 진입과 환율 위기라는 이중고(二重苦)를 극복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에게 일본의 성공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최근 일본 사회는 한껏 들뜬 모습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등 종합일간지를 비롯해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경제매체들은 조심스럽게 일본 경제의 부활을 점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도쿄증권거래소 주요 상장기업 530개사의 2014년 영업이익이 30조4000억엔을 기록, 리먼 쇼크 전인 2007년보다 약 4000억엔 증가했다.

과거와 비교해 확실히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대폭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실적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민간 주도형 제조업 4.0 바람 거세
최근 일본 재계에서 제조업 4.0에 대한 화두가 커진 것은 달라진 일본 경제의 한 단면이다. 제조업 4.0은 전통적인 제조업에 ICT(정보통신기술)를 결합시킨 개념이다. 제조업 강국 독일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제조업 4.0이 그동안 일본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은 민관 합동을 바탕으로 한 올 재팬(All Japan) 전략이 일본 산업 정책의 뼈대였기 때문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통합, 조정 작업은 일본 내 제조업 4.0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 최고 민간 싱크탱크 중 하나인 도쿄대 모노즈쿠리 경영연구센터가 최근 펴낸 보고서에서 새로운 제조업의 화두로 통합(Integral)이라는 개념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도 기존 민관 일체형 산업정책이 한계가 분명하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때문에 최근 일본 제조 현장에서의 팀워크, 정보 공유, 업무 호흡, 미세조정을 기술집약적 장인정신(모노즈쿠리)과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여기에는 소니 몰락을 재촉했던 가장 큰 문제로 사일로 현상(조직의 각 부서들이 사일로처럼 서로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자기 부서 이익만 추구하는 현상)을 지적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담겨 있다.

최근 일본 사회는 제조업의 부활에 한껏 희망을 걸고 있다. 소프트파워를 바탕으로 한 서비스 산업에서는 이미 아시아 최상위권인 상황에서 제조업 부활은 곧 일본 경제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국내에서는 일본 제조업의 부활을 엔저 효과로만 본다”면서 “최근 일본 제조업의 성장은 엔고 시절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실적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일본 기업들은 선택과 집중을 확실하게 한 곳이 대부분이다. 일본기업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가격경쟁력만으로는 뒤쫓아 오는 한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일찍부터 판단해서였다. 일본의 대표 전자 기술 기업인 소니, 샤프가 몰락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한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가격경쟁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크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밖에 없다. 원가절감 등을 통한 가격경쟁력 제고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소니만 해도 지난해 7월 PC사업부문을 사모펀드에 매각하고 TV사업부문도 분사(分社)시켰다. 대신 게임, 카메라용 센서, 스마트폰 등에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은 최근 시장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파나소닉 역시 가전분야에서는 손을 빼고 발전용 터빈과 전기자동차에 들어가는 2차전지 제작에 주력, 최근 빠른 성장세를 이루고 있다. 파나소닉은 연간 순이익이 50% 가까이 증가해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미쓰비시전기가 매년 역대 최고 이익을 달성하는 것도 가전에서 중전(重電)기기 사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히타치 역시 가전 분야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도시 인프라’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성과를 내고 있다. 정보통신과 부품, 기계라는 자체 역량에 사회 인프라와 그린 에너지 산업을 연결시켜 도시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분야다. 도시바, NEC 등 다른 전자 기업들도 대형 터빈, 변전기계와 같은 중전기기로 주력 분야를 바꾸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공작기계 제조 전문기업인 파낙은 실적 개선을 바탕으로 올해 일본 내 1300억엔을 들여 새롭게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국가들이 고도성장에 접어들면서 인건비 대체 차원에서 공정자동화를 위한 공작기기 수요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1. 지난 2012년 10월 초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전시회에 히타치가 내놓은 전기 자동차 충전 시스템. 2. 도쿄 마루노우치의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한 직장인 여성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해 증권사 계좌의 현금을 인출하고 있다.
1. 지난 2012년 10월 초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전시회에 히타치가 내놓은 전기 자동차 충전 시스템.
2. 도쿄 마루노우치의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한 직장인 여성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해 증권사 계좌의 현금을 인출하고 있다.

경쟁 없는 ‘제로원’ 시장 선점
선택과 집중 전략은 일본 내 강소(强小) 기업들의 생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독과점이 가능한 제로원(Zero one) 시장으로 옮겨가는 것이 최근 일본 강소기업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최대 강점인 부품·소재·장비 분야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12년 2월 동일본대지진, 엔고, 태국 홍수 등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50대 기업을 소개했는데 대부분이 높은 기술력을 보유한 부품·소재·장비 기업들이었다. 대표적인 교토(京都) 기업인 교세라, 무라타제작소, 호리바제작소, 니혼덴산 등 일본식 히든 챔피언은 오히려 경기 불황의 무풍지대와 같다. 혼다, 스즈키, 야마하 등 자동차, 오토바이 제조 기업들이 처음 세워진 나고야(名古屋)-시즈오카(靜岡) 벨트 내 기술 기업들도 최근 호경기를 이어가고 있다.

위축된 내수 시장에서 벗어나 일찍부터 해외시장 진출에 나선 기업들도 최근 실적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도요타자동차가 위기를 딛고 세계 1위 자동차 메이커에 다시 오를 수 있는 것도 신흥국에서의 완성차 공급이 어느 정도 성과를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무엇보다 일본 내 부품 강소 기업들이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도요타로 대표되는 자동차 산업이 굳건하게 버텨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흥국 시장 진출에 있어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볼륨존(Volume Zone) 전략이다. 지난 2009년 판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간한 통상백서에 처음 등장한 볼륨존은 신흥국 중간소득 계층을 의미한다. 통상백서에서는 볼륨존의 가계 가처분 소득을 5000~3만5000달러계층이라고 규정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볼륨존을 적극 공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2011년 3월 LG경제연구원은 보고서 ‘일본 글로벌 기업의 볼륨존 전략’에서 “초창기 일본의 볼륨존 전략은 소비재를 중심으로 구축돼 왔으나 이제는 점차 생산재나 인프라 분야에도 확산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일본 내 종이 기저귀 제조기업인 가오, 유니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동남아국가 내 종이 기저귀, 여성용품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현재 최고 외국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유아용품 기업 피존은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1854개 병원에서 ‘모유수유교육활동’을 전개한 결과, 주부고객들의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중국 유아용품점 전체의 20% 유아용품 전문점에 독립 코너를 설치, 판매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M&A(인수합병)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일본 M&A 컨설팅기업 레코프에 따르면, 올 1분기 일본 기업의 해외기업 M&A금액은 3조8842억엔을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6%나 늘어났다. 분기별로는 과거 최고치였던 2006년 1분기(3조7649억엔)를 넘긴 것이다. 히타치는 올해 초 이탈리아의 방위항공 업체인 핀메카니카로부터 철도차량·신호사업을 2600억엔에 매입했다. 리튬이온 전지 소재 기업인 아사히카세이도 미국 전지소재기업 폴리포아를 2600억엔에 인수했다.

금융기관 중에서는 다이이치생명이 지난해 6월 미국 프로텍티브생명보험을, 미쓰비시UFJ금융그룹은 태국 아유타은행을 5360억엔에 사들였다. 일본의 해외기업 인수는 현지진출 강화와 인재 활용 측면에서 다각도로 쓰이고 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는 “일본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적극 영입해 해외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 점도 최근 일본 기업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소니 ‘금융업’…구보타 ‘상하수도’ 개발
전자결제 시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리보다 발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이다. 소니의 경우 TV,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제조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매출의 40% 이상을 벌어들이는 사업은 생명보험과 인터넷은행이다. 특히 소니는 펠리카(Felica)로 부르는 인터넷 결제 사업에서 일본 내 최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내 최대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보유한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ATM전문 은행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다. ‘세븐은행’은 현재 수익의 90%를 ATM 이용 수수료에서 거두고 있다. 사업 방식이 단순한 만큼 수익률도 높아 지난해 212억엔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일본 상장은행 92개 중 23위다.

미국의 주유소 옆에 딸린 작은 식품체인점이었던 세븐일레븐은 일본으로 주인이 바뀐 뒤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오늘날 일본 최대 유통 기업으로 변신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경제·산업부장을 역임한 다마키 다다시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편의점에서 출발해 커피숍, 드러그 스토어(Drug Store), 외식업으로 넓히고 있는 세븐일레븐의 경쟁력은 수직·수평 성장을 모두 이룩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농기계 제조 전문기업 구보타의 경우 오사카(大阪) 상하수도 개발 사업에 뛰어든 후 수처리 전문 기업으로 전환했다. 20년 넘게 탄소섬유 개발에 투자해 최근 세계 최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화학기업 도레이와 도레이에서 제공받은 특수 섬유로 옷을 만들어 일본 대표 의류브랜드로 성장한 유니클로도 차세대 일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