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업분야에서 광복 이후 70년의 최대 쾌거는 ‘녹색혁명을 이룬 통일(統一)벼’ 개발이다. 통일벼 보급은 국민의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한 일대 혁명이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까지도 쌀이 부족해 매년 수십만 톤의 쌀을 수입해야 했다. 보리 이삭이 팰 무렵이면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식량자급은 해방 이후 국가적인 숙원이었다. 농촌진흥청이 1962년 설립돼 벼 연구 인력과 시설이 보강되면서 주곡(主穀) 자급 달성을 위한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63년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IRRI)와의 교류가 시작된 이후 품종개발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벼는 동북아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Japonica) 품종과 태국·베트남 등 열대지방에서 재배하는 인디카(Indica) 품종으로 나뉘었다. 자포니카는 쌀 모양이 둥글고 차진 반면 인디카는 가늘고 길며 찰기가 부족하고 푸석푸석했다. 하지만 자포니카 품종들은 키가 커 이삭이 조금만 무거워도 수확을 앞둔 가을 비바람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병충해에도 약했다.
키가 작아 쓰러지지 않고도 소출이 많이 나는 품종 개발이 육종연구팀의 목표였다. 실질적인 연구는 IRRI에 초청연구 원으로 가 있던 허문회 서울대 농대 교수로부터 출발했다. 허 교수는 IRRI에서 개발한 벼 품종과 대만·일본의 벼를 교배해 ‘IR667’이라는 잡종을 개발했다. 육종연구팀은 IR667을 여름에는 한국에서, 겨울에는 필리핀의 IRRI에서 번갈아 가며 재배해 우량한 계통을 선발했다.
드디어 1971년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잘 쓰러지지 않으면서 이삭 당 벼 알수가 많이 달리는 ‘통일벼’를 개발했다. 보통 한 품종을 개발하는 데 10년 넘게 걸리던 것을 6년 만에 개발한 것이다.
당시 통일벼 품종 개발에 참여했던 최해춘 전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수도육종과장(박사)은 “우리나라와 필리핀에서 연구를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품종 개발기간을 절반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육종체계는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통일벼는 국내에선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저온에 약하고 벼알이 잘 떨어지며 쌀알이 다소 갸름하고 맑지 못해 시장성과 밥맛이 떨어지는 단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쌀을 자급해야 할 국가적 소명이 더 강했다.
통일 쌀의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진흥청을 찾아와 직접 밥맛 검정을 해보고 “이 정도면 좋다”는 평가를 내렸다. 당시 박 대통령은 자주 농촌진흥청을 찾아와 연구원들의 사기를 높였고, 모내기 행사에도 직접 참여해 모를 심기도 했다.
새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시 3년 동안 종자 증식 단계를 거쳐야 한다. 통일벼는 1970년 겨울 동안 필리핀 IRRI에서 1ha를 재배해 거둔 4.3톤의 볍씨를 다음해 4월 국내에 들여왔다. 이 볍씨를 전국적으로 2750ha의 농가에서 시범 재배했다. 그 다음해에는 다시 재배면적을 늘리면서 신품종을 농가에 보급시켰다. 당시에 통일벼 품종은 ‘효자벼’로 불렸다. 수확량이 늘면서 제사상에 흰 쌀밥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재배 면적을 크게 늘린 그 다음해 냉해(冷害)가 발생해 통일벼가 재배된 곳곳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수확량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쌀 모양이나 밥맛이 좋지 않다는 소비자들의 평가를 받아 쌀값도 크게 떨어졌다.
최 박사는 “다음 해에는 통일벼를 재배하지 않으려는 농민들이 속출했다”며 “다행히 정부가 제값을 받을 수 있게 통일벼를 모두 수매해주고, 나중에 싼값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를 실시해 통일벼의 재배면적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통일벼 노하우 각종 기능성 쌀 개발로 이어져
농촌진흥청 육종연구팀은 통일벼가 가진 단점을 하루빨리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통일벼 보급에 이어 단점이 개선된 유신·밀양23호·금강벼·밀양30호 등 많은 통일형 품종들이 연이어 개발돼 보급됐다.
1976년에는 드디어 오랜 숙원이던 주곡(主穀) 자급 달성의 위업을 이루게 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풍작을 이뤄 쌀 생산이 4200만 섬을 돌파했다. 1978년에는 통일형 품종이 전체 벼 재배 면적의 76%를 차지했다. 그해 쌀 생산량은 ha당 4.94톤으로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최 박사의 말이다. “쌀 수급에 여유가 생기면서 1977년에 처음으로 쌀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도록 허용됐어요. 돼지고기에 쌀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북새통을 떤 것이 마치 엊그제 같아요.”
1974~81년에는 매년 64~120톤의 신품종 볍씨를 겨울 동안 필리핀 농가에서 생산해 다음 해 봄에 비행기로 싣고 와 전국 농가의 논에 재배했다. 통일벼가 재배되는 농가현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농촌진흥청의 농촌지도사들이 바로 달려가 해결 방안을 찾아주기도 했다.
최 박사는 녹색혁명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필리핀에서 연구원들이 수십 ha의 논에서 직접 벼를 재배했어요. 농부나 다름없었죠. 1만여 종을 재배해 밥맛을 검정하고, 여기서 선발된 계통을 또 심는 일이 반복됐죠. 농촌지도사들은 농민들에게 일일이 새로운 재배법을 가르쳤어요. 그런 노력들이 기반이 돼 녹색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벼 품종개발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기능성 벼 품종개발이 그것이다. 다이어트식으로 가공할 수 있는 ‘고아미2호’, 막걸리용 쌀인 ‘설갱’, 발아현미용 기능성 쌀 ‘큰눈’, 혈압 강하용 기능성 쌀 ‘홍진주’ 등이 대표적이다.
이점호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과장은 “통일형 벼 품종은 1990년대 우리 들녘에서 사라졌지만, 저개발국의 빈곤퇴치용 품종으로 해외에서 꾸준히 연구·보급되고 있다”며 “지금은 선배들이 이룬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능성 쌀 개발을 통해 농가의 소득을 늘리고, 가공 제품의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량자급 디딤돌 된 배추품종 육성·백색혁명]
미래창조부가 지난 7월 선정한 ‘광복 70년 과학기술우수성과 70선(選)’에는 녹색혁명 통일벼 개발과 함께 배추 품종 육성, 백색혁명 등 3건이 뽑혔다. 이 3건의 농업기술은 해방 이후 국민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식량자급을 해결함으로써 국가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배추 품종 육성은 우장춘 박사가 기존의 재래종이나 도입종의 한계를 넘어 최초로 일대잡종을 만들어낸 성과를 말한다. 유전적으로 종자를 만들기 어려운 배추에 최첨단 육종기술을 이용해 만든 배추품종인 원예1호와 고순도 품종인 원예2호는 속이 꽉 찬 현대 김치배추의 시발점이 됐다. 지금은 배추의 유전체를 해독해 지식기반 육종을 통해 고품질의 신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백색혁명은 소비자에게 연중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기 위한 멀칭 재배(지표면에 비닐을 덮어 재배하는 방법)와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확립하고 현장에 보급한 성과다. 비닐하우스가 개발되기 전 겨울철에는 채소재배가 불가능했다. 1970년대 비닐하우스가 개발, 보급되면서 소비자들은 1년 내내 신선한 채소를 식탁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 멀리서도 온실 내 장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온실’ 단계까지 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