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중원의 지배자 금나라 황제-고려 왕건은 한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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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판 칭기스 칸의 계보도 영인본.

 
(1편에서 이어짐)

칸의 특명으로 집필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
 
-앞서 말씀하신 《집사》나 《사국사》 같은 사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집사》에 기록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비밀  
 
-위 사서를 쓴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자랑스러운 칭기스 칸의 조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굳이 그 이면의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서들은 당연히 칭기스 칸 가문에 내려오는 족보를 본대로 들은 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 10대 혹은 20대 선조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원래의 고대 말갈어(우리말)로 된 인명과 고대의 지명이 몽골어나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또는 한자어화되면서 원음과 많이 달라졌고, 또 그마저도 오늘날의 언어들이 아니라, 중세기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페르시아어와 몽골어 등 그 외국어 본문 속에 있는 인명 지명들은 본문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갈어로 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단번에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서를 교차 대조하고, 칭기스 칸이나 그 이전 선조들이 살았던 당대의 언어 고증을 통해 이런 인명과 지명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 몇 가지 사서는 원래 《황금의 책》 곧 ‘족보’에 기반하여 그 선조들의 생전의 활동기록인 행장(行狀)을 곁들인 글들입니다. 그 《황금의 책》 족보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말하듯이 황제의 재고에 비밀스럽게 간수되어, 황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대아미르들이 항상 지키고 있던 책입니다. 곧 이 책은 비밀스러운 황족의 뿌리를 적은 책인데, 그 내용을 올바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것에 바탕을 둔 사서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칭기스 칸 선조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분화되었습니까.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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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아르가나 콘’으로 피신한 칭기스 칸의 시조들
 
전 박사는 이 전쟁에 나오는 ‘키안’은 라시드가 ‘모골어(몽골어)’로 ‘산골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말갈인들이 한자말로 표현한 ‘산골 물 간(澗)’이고 ‘니쿠즈’는 말갈말로 ‘님금’이란 말이 모양을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라시드가 말한 ‘모골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말 방언인 ‘말갈어’였고, 또 ‘니쿠즈’는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로, ‘님금’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때 아르가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죠.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죠.”
 
콩그라트 지파가 아르가나 콘을 빠져 나온 이야기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발해 왕가의 일족이 칭기스 칸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날 여러 종족으로 분화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골족의 아르가나 콘 탈출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나온 종족은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인 ‘황금항아리’가 이끄는 부류로, ‘다른 종족과 상의도 없이 다른 종족의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용광로지를 짓밟고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는 탈출이 아니라 발해 10대 왕 선왕(宣王)의 밀지를 받고, 압록강네 군을 빠져 나와 그 전설적인 ‘타타르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 곧 ‘발해-당·신라전’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땅과 북쪽의 흑수 땅 등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흑수 등 말갈 고을들을 치러 출정한 것입니다.  
 
발해의 남쪽 땅이라고 제가 표현한 땅은 평양의 대동강에서 한강 이북 땅을 말하고, 원래 고구려 땅이자 발해 초기의 땅입니다. 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콩그라트 종족이 뛰쳐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공격에서 발해가 이겼던 것이 확실합니다. 동방사서 《통감》 등 당나라 측의 사정을 적은 사서들은 ‘선왕이 바다 북쪽의 말갈 등을 쳐서 땅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또 신라 측 기록도 발해와 신라 국경이 한강 이북의 경기도 땅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때부터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라는 ‘황금항아리’는 또 누구인지요.  
 
“놀랍게도 이분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가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곧 그들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전원철 박사는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은 ‘서해’,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한다.  
 
곧 ‘용왕(龍王)’의 ‘용(龍)-’은 우리말로 ‘고렝이/고레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고려’의 옛소리인 ‘고라이’와 같아, 그 고려를 ‘용’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왕건의 즉위를 예고하는 도참설(圖讖說)의 비문(秘文, 비밀코드)에서도 사용한 당시의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결국 왕건의 외증조가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고 쓴 것은 그가 ‘발해(서해)-고려왕’(고레이, 고렝이, 구렁이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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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내)몽골 다구르 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 선생 주해의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이라고 번역되는 《알탄 톱치》.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 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숙신(肅愼)과 같은 소리값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 
 
한편 신라는 당시 금행이 회복하여 다스리던 땅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자주 침공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해의 내지인 반안군(盤安郡)에서도 부락이 두 개의 종족(지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스런 일이 있어났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 
 
“신라의 침공을 받자 할 수 없이 금행과 그 맏아들, 《금사》에서 아고래(阿古迺), 곧 그 소리가 ‘고구려’와 같은 ‘카고라이’로 기록된 인물은 고향 평주에 남고,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보(函普)와 보활리가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와 ‘야라(耶懶)’로 각각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약 250년 뒤 고려 예종 때인 1113년경에는 《고려사》에서는 ‘여진(女眞)’으로 적히고, 《금사》에는 ‘완안부(完顔部)’로 불리게 되는 지방입니다. 
 
형인 함보가 들어간 《금사》의 ‘복간수(僕幹水)의 물가 땅(涯)’에서 ‘복간수(僕幹水)’는 ‘보카리’ 곧 ‘모구리(고구려, 무쿠리) 물’이라는 강 이름이고, 그 물가의 땅은 《고려사》가 오늘날의 소리로 ‘여진 아지거촌(女眞 阿之居村)’이라고 기록한 곳입니다.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야라(耶懶)’는 당시 ‘갸라이(고려)’라는 소리를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 지명은 또 옛소리로는 ‘코라이 땅’, 오늘날의 소리로는 ‘고려땅’이라는 지명입니다. 여진 및 고려식 이두로 적은 ‘갈라전(曷懶甸)’이 바로 그것이고, 원나라 때 몽골어 소리를 한자로 적은 ‘코랄라(合蘭路, 합란로)’가 같은 땅입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각각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남도 함흥지방입니다.”  
 
-당시에 여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여진(女眞)은 옛 한자 방언소리를 아직도 간직한 오늘날 일본어(日本語) 한자 소리로 ‘죠신’인 것과 같이, 예전에 그 소리가 ‘조신’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입니다. 이 말들을 두고 우리 학자들 대부분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뺏으려고 하는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셨겠지만요.” 
 
전 박사는 “여진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별다른 종족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여진에 대해 보완설명을 이어갔다. 
 
“옛 조선, 곧 고조선에서 나온 고구려의 가닥족속인 발해왕족 대조영의 가계를 숙신의 후예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을 보세요. 고구려와 발해가 한 집안이고 고구려는 옛 조선(朝鮮)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조선’과 ‘숙신’은 한 가지 같은 것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이 말을 후대에 와서 당시에 같은 소리 값을 가졌던 ‘조신(女眞)’으로 쓴 것입니다.  
 
이 조신(女眞)을 여직(女直), 여정(女貞), 여진(慮眞), 주신(珠申)등으로도 쓰는데, 이는 모두 옛 조선(朝鮮)=숙신(肅愼)이라는 말입니다. 중세 몽골어로 이를 ‘조르친(Jurchen)’이라고 하고 만주어로는 ‘주션(Jushen)’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남방 한어(漢語) 방언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여진’이라고 합니다. 단, 당시의 소리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 ‘조선(朝鮮)’이 나오는 것이죠. 그 ‘조신(女眞)’ 땅인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의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이 함보의 7대손이 바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입니다. 발해가 망한지 약 190년 후이죠.” 
 
조상의 영지인 발해 반안군으로 돌아간 칭기스칸 선조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함보 형제는 함보 형제→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야발으로 올라가는 계보에서 그들의 5대 선조인 대야발의 영지로 들어간 거지요.” 
 
-우리 학자들은 함보를 발해가 아닌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분명하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 학자들 중에는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신라가 망하는 936년 이후에 신라 왕족이나 유민이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함보 형제는 이보다 근 80년 앞서 857년경 발해시대에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가 아니라, 발해(渤海) 시대의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함보는 왕건보다 할아버지뻘입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이 왕건의 외증조부이고 그 아들이 함보니까요. 이 물음을 좀 차분하게 잠시만 봅시다. 아골타와 같은 시대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때이고 왕건과 같은 항렬의 시대가 《금사》의 발해(拔海), 곧 함보의 손자 때입니다. 그런데 왕건 조차도 이미 나이가 늙은 시절인 936년경에 신라 말대왕 김부가 그에게 귀부하여 옵니다. 고려는 이 덕택에 이른 바 후삼국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왕건보다 2~3대 전에 어찌 신라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그 유민들이 강원도도 아니고 발해의 내지인 함경도로 들어갔겠습니까?”  
 
-사서에 함보가 신라인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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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 출신의 마일스 대령이   1838년 번역한 <투르크와 타타르의 계보>.


고구려 건국에 참여하는 금행의 후손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그렇군요. 오늘날 학자들이 잘못 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여러 기록이 좀 두서없이 기록된 이유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사실 관계를 고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풍토 중에 하나가 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시대나 인물의 정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주장이라도 교수나 학계 학자들의 입을 통하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백의종군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교수나 제도권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학문적 풍토이자 사회 현실입니다. 
 
제 책의 본문에 실어 둔 것처럼, 두 집안의 계보에 기반하여 간단한 세대 비교도표 하나만 만들면 이미 답이 나오는데, 게으른 학자들은 이것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논문 발표회이다, 언론이다, 방송에 나와서 대중을 헛된 지식으로 이끈 결과라고 봅니다.” 
 
-박사님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함보는 시기적으로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고향에 남았다는 금행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아고래가 어떻게 고구려라는 뜻인지요.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들에 관해 설명할 필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금행의 맏아로 밝힌 아고래(阿古迺)는 그 옛소리가 ‘카고라이’, 곧 ‘고구려’라는 소리입니다. 그의 손자 <금사>에는 적히지 않았고, 서방사서 《행운의 정원》이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칼지타이 칸(Qaljiday Khan)’이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고려사》에 ‘아지태(阿志泰)’로 적혔습니다. 이 이름의 오늘날의 소리와는 달리 당시의 한자소리는 ‘카지타이’입니다. ‘아지태(阿志泰)’라는 이름에는 <행운의 정원>이 기록한 그 “칼지다이 칸”에서 다만 존칭인 ‘-칸’이 빠진 이름이죠. 물론 소리문자로 적은 <행운의 정원> 속의 “칼지다이 칸”은 오늘날 우리말 ‘클씨씨 왕(乞氏氏 王)’이라는 우리말 소리에 아주 가까이 적혔죠.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집사》 등 여러 사서에서 ‘투스부다우’로 적혔는데, 이는 ‘대씨부 대/두(大. 頭)’, 곧 ‘대씨부의 수령’이라는 이름입니다. 그의 손자로 《사국사》가 ‘율두즈 콘(조선씨 왕)’이라고 하고, 《셀렝게 부랴트인들의 역사》 등이 ‘바르가 타이상 노욘’이라고 기록한 이가 있습니다. 말갈어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라는 이름이죠. 여기서 칼지다이 칸은 칭기스 칸의 부인인 부르테의 선조입니다. 바르가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로 《집사》에서는 ‘미사르 울룩’이라는 사람입니다.” 
 
궁예와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 핏줄 
 
전 박사는 “이 칼지다이 칸 ‘아지태’와 ‘바르가 타이상 노욘’, 곧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 섬긴 궁예는 스스로가 ‘신라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제가 족보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궁파(弓巴), 달리 궁복(弓福)인데 이 궁파는 바로 함보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큰 바’, 곧 ‘큰 가(대씨, 고씨)’를 이두로 적은 이름입니다. 함보의 이름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칸보(鐶浦, 환포), 청대에는 캄부(堪布, 감포)로도 적혔죠. 이 궁파(弓巴)가 바로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 아니 사실은 고구려-말갈식 ‘성씨’를 이름처럼 쓴 것입니다.” 
 
-장보고의 성씨는 장씨인데 무슨 근거로 그가 궁씨라고 연결지을 수가 있는지요. 
 
“장보고의 한문식 성은 ‘활 당길 장(張)’ 자를 써서 ‘활’ 곧 ‘궁(弓)’ 으로 하고, 활의 옛소리인 ‘코리’(弓)로 한 성씨입니다. 이는 ‘고려’를 말하는 겹뜻말(중첩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 몽골어로도 덮개 달린 화살통(dabčitu qor)을 ‘코르(qor)’라고 합니다. 이는 《몽골비사》 리게티(Ligeti)본을 확인해 보면 아실 것입니다만.
 
또 장보고의 성씨 ‘장’ 을 뺀 그의 이름은 ‘고구려’를 말하는 ‘무구리/무쿠리/보코리’인데, 이를 한자로 ‘보코리(保皐)’로 쓴 겁니다. 맨 끝의 ‘-리’ 소리는 오늘날에도 말할 때에는 ‘-ㄹ’소리를 내면서도 글자로 적을 때에는 안 쓰는 이른 바 북경화(北京話)의 ‘얼화(兒話)’와 같이 당시에도 안 쓴 겁니다.  
 
곧 ‘고려-무쿠리’ 장보고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곧 고장(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 왕족 안승의 증손입니다. 보장왕에서 치면 4대손이죠. 궁예는 그 이름이 기록 안 되었지만 사서가 말하기로 궁예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고 하므로 어머니 ‘궁씨녀’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6대 외손이죠.”  
 
-이런 내용도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은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이 때문에 궁예가 신라왕궁에서 버림을 당하자, 성씨를 외가성 궁파(弓巴), 곧 ‘궁가(弓哥)’로 쓰고 이름을 ‘예(裔)’로 한 것입니다. ‘궁(弓=高)씨의 후예(裔)’, 곧 고구려 왕가의 서자가계의 후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큰(大)=궁(弓)=높은(高)씨의 후예(裔)’라는 뜻이죠.” 
 
-칭기스 칸 선조 이야기가 결국 이야기가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역사와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궁예를 도운 발해대상랑, 곧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가 결국 고구려-마진-태봉 창건의 주역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궁예를 도운 왕건이 나중에는 오히려 주군인 궁예를 제거하고 자기가 새 왕이 되죠. 그런데 이 왕건은 아까 말한 대로 서해용왕(금행)의 외증손입니다. 발해대상랑과는 재종외아저씨와 조카 사이이죠. 이들은 때로 신라 땅이 된 곳에 살면서도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자부한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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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모습./ KBS


왕건의 궁정혁명에 밀려 후고구려를 떠난 발해대상랑 
 
-말씀하셨듯이 결국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잖습니까.  
 
“궁정혁명을 일으킨 것이죠. 궁예가 왕건 자신의 선대의 외가쪽인 아내 강(康)씨와 두 아들을 죽이고, 개성 호족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를 치고, 갓 세운 나라를 굳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아직은 나라의 기반이 약했죠. 후백제가 발호하고, 신라가 건재했으니까요.  
 
북쪽에 발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터에 그 지지세력을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한 불교에서 찾고, 미륵불 신앙을 지나치게 믿었죠. 또 반역을 예방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에 심취하면서 아예 전제적인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근신들이 점점 그로부터 멀어져 갔고, 또 고구려 왕가의 외손인 왕건을 덕 있는 군주감으로 생각한 그 무리의 도움으로 결국 왕건이 정권을 빼앗아 나라 이름을 처음의 ‘고려’ 즉 ‘고구려’로 되돌렸습니다.”
 
-그것이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후삼국이 분열하고, 왕건이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할 때까지 발해가 건재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다행도 잠시였습니다. 그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 곧 강계와 삼수, 갑산 땅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 그러니까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에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전쟁이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실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이번에 펴낸 제 책에서는 깊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
 
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이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칭기스 칸의 선조들은 우리 땅으로부터 멀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단,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3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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