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이즈미르의 에페소 유적.
- 터키 이즈미르의 에페소 유적.

트로이 전쟁을 읊은 호머(Homer)의 일리어드의 발자취를 따라 트로이를 탐사한 이상 그의 고향이 있는 이즈미르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미르에 가는 길은 우회에 우회를 거듭했다. 그만큼 호머의 고향은 저 멀리서 나를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파도키아를 거쳐 숨을 고른 다음에도 나는 바로 이즈미르로 가지 못하고 이스탄불을 거쳐 비로소 이즈미르에 도착했다.

그 여정에서 나는 구름 위의 천상의 나라, 샹그리라를 목도했다. 이른 아침 카파도키아에서 카이세리 공항으로 오는 길이었다. 해발 4000여 m의 카이세리를 굽어보는 근교의 눈 덮인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구름으로 사방을 띠로 두르게 하고 그 위에 우뚝 솟아 마치 하늘 한 가운데 자신을 홀연히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저 구름 위가 바로 샹그리라가 아니던가. 열락, 환희의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나중에 이 산이 카이세르의 상징인 ‘에르지에스산’ 이라는 걸 알았다)

에게 해의 진주로 불리는 이즈미르! 터키에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비행기 내의 상공에서 본 그 산하는 우리의 산하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가벼운 흥분마저 든다. 공항에 내리니 호랑이 장가가는 빗방울이 햇빛을 등지고 간간이 뿌리더니 이내 거둬들인다. 개다 흐리다를 반복하는 날씨는 한국의 날씨와 기온차가 거의 없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즈미르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에 있는 터키 중동부 지역인 아피온(Afyon)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아뎀 사장이 공항에 마중 나왔다. 그는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5년을 산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한국말을 꽤 잘 하는 편이었다. 아피온에 있는 그의 공장에는 한국인 직원도 4명 있다고 한다. 바쁜 가운데 이곳 이즈미르까지 와 준 데 고마운 마음이 더 들었다.

이즈미르 시내 전통시장 바자르 우리 장터 풍경 떠올리게 해
숙소인 이즈미르 시내의 스위스호텔의 객실에서는 에게 해의 푸른 바다와 그 위를 미끄러져 가는 선박들이 바로 보였다. 오후 6시경 아뎀 사장과 함께 이즈미르 시내의 전통시장 바자르를 둘러보았다. 시장은 정겹고 훈훈한 인심이 솟구치고 있었고 호객행위도 전혀 없다. 옛 우리의 장터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그곳에 있는 무슬림 사원(모스크)에 가니 마침 예배 중이어서 나도 경건한 마음으로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직접 예배 기도에 참여했다.

저녁 식사는 이즈미르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웃프크 예르잔 사장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하게 되었다. 기계 엔지니어인 웃프크 사장은 스티로폼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의 창업 파트너이자 주택건설 사업자이기도 하다. 그의 차량으로 아뎀 사장과 함께 이즈미르시 외곽에 있는 그의 집에 저녁 7시30분경 도착했다. 에게 해를 마주보면서 별장식으로 넓게 꾸며진 200여 채의 집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것이 마치 농촌의 어느 훈훈한 마을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주변에는 새 소리와 개구리, 오리 소리 등이 어우러져 숲속의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주택들 모두 웃프크 사장이 건축해 분양했고 자신도 이곳 한 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아내는 이즈미르에 있는 게디즈(GEDIZ) 대학교 경제경영학부 교수라고 한다. 지적으로 보이는 미인형이었다. 이들 부부는 딸만 셋으로, 큰 딸은 현재 런던에서 공부 중이라고 하고 둘째 셋째는 인사를 시켰다. 집안은 비교적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아내는 먼저 거실에 TV가 없는 것이 눈에 띄었는지 묻는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웃프크씨는 형제의 나라에서 온 귀빈을 초대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

터키 사람들은 오스만 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을 전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각국에서의 교육사업을 위한 일에 자신도 직접 관여하고 있으며 현재 140여 국가에서 이러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터키 커피.
- 터키 커피.

터키인의 정신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온 것
웃프크 사장은 터키인의 정의(Justice), 공존, 화합의 정신은 바로 오스만 제국의 정신으로부터 왔다고 강조했다. 내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나는 흥미의 도를 넘어 그와의 대화에 몰입했다. 오스만 제국은 점령지 내지 통치지역의 주민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자존심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아와 빈곤을 다독여 주었다고 한다. 일례로 18세기 영국이 인접국인 아일랜드 기근 때 같은 인종이면서도 그들을 핍박하고 학살할 때 오스만 제국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면서 현재의 중동 아랍지역의 분쟁은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없었다면서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서양의 반(半) 식민지화가 촉진되면서 오늘날까지 분쟁과 불안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학자들이 이 점을 연구하면서 중동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오스만 제국의 정신적 부활이 요청되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관용성과 포용력, 그리고 그에 바탕한 팍스 오스마니아(Pax Osmania)에 대해서 얘기했다.

서구인이나 우리는 흔히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튀르크 내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그들의 과거 제국을 결코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은 단지 튀르크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다양성과 공존, 관용의 정신이 살아 있는 국제성을 띤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1299년 오스만 부족장에 의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부르사에서 건국된 오스만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의 유산을 흡수하면서 성장을 거듭하다가 1402년 앙카라 근처에서 티무르군(軍)에게 패배함으로써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오스만 제국은 드디어 메흐멧 2세 때인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1000년간 이어오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계사의 주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학계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1453년을 유럽의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세가 시작된 해로 여기고 있다. 그만큼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세계사적 의의, 즉 서구중심의 기독교 문명에 큰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셀주크 튀르크 제국과 티무르 제국을 사실상 계승했던 튀르크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은 1923년, 그 정신을 이어받은 현 터키 공화국에 의해서 멸망할 때까지 600년 넘게 존속하면서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전성기인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후반까지  120여 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몽골 제국, 대영 제국에 버금가는 세계사의 주역을 담당했다.

제국 정신의 핵심은 다양성과 관용성(포용성)에 있다. 그 정신이 쇠퇴할 때 제국은 멸망한다.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몽골 제국이 그랬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 민족 간에서의 관용성과 다양성이 근세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정된 대표적인, 아니 유일한 제국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오스만 제국은 피지배자들을 크게 압박하지 않고 통치해 왔다. 특히 이교도인 유대인(유대교), 기독교, 그리스 동방정교, 아르메니아 정교 등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 원칙은 간혹 예외가 있긴 했지만 일관되게 지켜져 왔다. 오스만 제국의 관용정신은 그 역사 대부분의 과정에서 오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종교, 다민족 정치 체제’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싶다.

현재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지역은 500년 넘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팍스 오스마니아 시대에는 얼마간의 작은 충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민족, 이종교 또는 타종파 간의 심각한 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집단이 그곳에서 평화롭게 생활했었다. 적어도 1차 대전까지는 중동의 이슬람 사회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소수민족의 지위인정과 다원주의적 공존에 익숙해 있었다. 2000여 년간 아랍인과 유대인이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함께 공존해온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순식간에 중동지역은 혼란에 빠져 들었고 그 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삼 오스만 제국의 종교, 민족에 대한 관용성이 느껴진다.

또 하나의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로 눈을 돌려 보자. 19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의 쇠락으로 유럽지역(발칸반도)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둘러싸고(이른바 동방문제) 팽창적인 유럽 열강들 사이에 국제적인 불안정 상태가 야기되었다. 결국 이 동방문제의 해결이 실패하자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의 문제는 현재도 코소보 사태, 세르비아계에 의한 인종청소 등의 문제로 오늘날까지 그 명암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이 역시 관용성과 다양성을 존중한 오스만의 지배, 즉 팍스 오스마니아가 돋보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미국의 학자들 사이에서 오늘날 꼬이고 꼬인 중동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오스만 제국의 정신적 부활이 요청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동지역뿐만 아니라 유럽 발칸반도 지역 역시 팍스 오스마니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본다. 아니 현재 전 세계의 인종, 종교 간의 갈등을 둘러싼 끊임없는 분쟁의 불씨를 누그러뜨리는 데에도 팍스 오스마니아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오스만 제국을 연구하고 그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오스만 제국이 거의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보여준 관용적인 통치의 모범 때문이다.” 미국 뉴욕 빙엄턴 대학의 도널드 쿼터트 교수의 말이다.(그의 저서 <오스만 제국사> 서문)

웃프크 사장 역시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면서 자신의 선조는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터키가 가진 역사적 유산, 특히 오스만 제국의 유산인 관용과 정의, 평등과 공존의 정신을 바탕으로 터키는 계속 전진하면서 세계사의 무대에 나서야 할 것을 다시 지적한다. 이러한 정신과 자신감으로 터키의 경제도 활력과 성장,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내가 터키에 와서 열흘 정도 겪은 결과 터키 사회가 활력과 역동성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터키가 오스만 제국의 관용성과 포용성, 공존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우뚝 서기를 바란다”면서 식사 전 환담을 마쳤다.

식사는 터키 전통식단이었다.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차려나온 음식을 정담을 곁들이면서 맛있게 들었다. 식후 진한 터키 커피의 맛을 보면서 디저트를 먹었다. 웃프크씨 부부는 우리에게 터키 전통 도자기로 된 사물함을 선물로 주었다. 나도 미리 알았더라면 서울에서 우리 고유의 것을 상징하는 선물로 준비할 것을 하면서 아쉬워했다. 대신 호텔에서 케이크를 사간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흐뭇한 분위기 속에 많은 후속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내일을 위하여 밤 11시경 아쉬운 마음으로 그의 집을 나섰다. 웃프크씨가 직접 차를 몰고 우리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었다. 거듭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9시 그는 다시 호텔로 우리를 픽업하러 왔다. 오늘 에페소 관람을 하기 전에 먼저 그의 회사를 방문하여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즈미르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그의 공장과 사무실은 조용하고 쾌적한 농촌지역에 위치해 공장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하였다. 스티로폼 생산 기계를 만드는 과정과 예술적 디자인의 스티로폼 재생과정을 보았다. 특히 스티로폼 재생 기계는 터키에서 최초로 그의 공장에서 제작 중이라고 했다. 흔히 포장용으로만 알고 있는 스티로폼이 다양하게 색상을 가미하면서 디자인 장식용으로 제작 판매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무실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가진 후 기념촬영을 했다. 내가 온다는 것에 대비해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다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어 10시30분(2013. 5. 13) 그가 제공한 차량으로 에페소를 향해 출발했다.

(상)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이즈미르 항구. (하)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5년을 산 아뎀 사장(맨 오른쪽)과 함께 웃프크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 네 번째가 부부의 모습) 댁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했다.※ 사진제공 : 이석연 변호사
(상)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이즈미르 항구.
(하)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5년을 산 아뎀 사장(맨 오른쪽)과 함께 웃프크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 네 번째가 부부의 모습) 댁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했다.
※ 사진제공 : 이석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