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인천 송도 시가지 서킷에서 개최된 ‘2014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 개막전에는 약 13만명에 달하는 관중들이 모였다. <사진 : 조선일보DB>
- 2014년 인천 송도 시가지 서킷에서 개최된 ‘2014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 개막전에는 약 13만명에 달하는 관중들이 모였다. <사진 : 조선일보DB>

레이싱 산업이 가장 발달한 국가인 영국에서는 가끔 진풍경이 펼쳐진다. 70대를 바라보는 지긋한 레이서가 족히 50년은 되어 보이는 자신의 페라리를 끌고 현장에 나온다. 얼굴 반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공군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레이싱복을 완벽히 차려 입고 나온 레이서는 ‘과연 저 차가 굴러가기나 할까?’라는 의문을 떠올리는 관중들 앞에서 보란 듯이 시범주행을 성공시킨다.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차가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덜덜거릴지라도 비웃는 사람은 없다. 관객들은 주행을 마친 레이서에게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는가 하면, 관람석에서 일어서서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오랜 레이싱 산업 역사를 간직한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모습이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F1 대회는 지역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한 번 대회가 열리면 일대의 가게와 숙박업소는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1997년 F1 대회가 주는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를 보고 낙후지역인 마니꾸르를 개최지로 선정했다. 영국은 F1 경주장을 중심으로 세계 최대 모터스포츠 밸리를 조성했다. 이후 관련 업계가 성장하고 4만명가량의 고용 창출 효과를 봤다.

매년 세계 20개국에서 열리는 ‘FIA 포뮬러 1(F1) 월드 챔피언십’은 모터스포츠를 사랑하는 이들의 축제의 장이다. 각종 자동차 제조사들이 엔진의 성능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레이싱 문화가 꽃 피는 곳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이 뒤따른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중국은 카레이싱, 카트레이싱 등 모터스포츠 산업이 발전한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100년 역사를 지닌 자동차기업들이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마차, 기차와 대결하던 것이 경쟁사 차와의 경주로 이어지면서 카레이싱 문화가 생겨났다. 이동훈 레이싱아카데미 대표는 “1등한 차는 자연스럽게 잘 팔리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기술개발을 더욱 열심히 한 결과, 자동차산업이 동시에 발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방송사도 ‘카레이싱’ 주목하기 시작
영국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1998년부터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니코 로즈버그, 세바스찬 베텔 등 올해 F1 경기에서 선전하고 있는 선수들과 전설적인 카레이서인 미하엘 슈마허를 배출해 낸 국가가 독일이라는 점에서 독일의 레이싱 산업 발전도는 예상가능하다.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상용차를 개조해 참여하는 나스카(NASCAR), 인디레이싱리그(IRL) 등의 대회가 주로 열린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카트 서킷과 모터스포츠 파크 등이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시아에서 모터스포츠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은 일본이다. 1960년대에 일본 내 최초의 서킷인 ‘스즈카 서킷(suzuka circuit)’이 건설됐을 정도로 시작이 빠르다. 아시아 국가 중 모터스포츠 기반 시설이 가장 잘 돼 있다. 이 대표는 “일본은 자동차 산업을 키우기 위해 트랙 등 레이싱 기반 시설을 많이 만들었고 당시 사회적 문제이던 ‘폭주족’을 레이싱 인구로 유입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아주 오랫동안 카레이싱 문화가 뿌리 내린 외국과 달리 한국은 몇몇 소수의 마니아들이 모터스포츠 시작을 알렸다. 이들이 모여 1980년대 중반에 한국모터스포츠클럽을 만들었고, 공식적인 레이싱 경기가 열린 것은 1987년부터다. 최초의 서킷은 1993년 경기도 용인에 건설됐다. 국내 자동차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국제 경기에 나선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에 따르면 지난해 공인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레이스 또는 카트 라이센스를 취득한 사람의 수는 494명이다. 2011년(166명)부터 2012년(215명), 2013년(303명)까지 꾸준히 늘었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아마추어 레이서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레이싱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욱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레이싱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도 모터스포츠 마니아들에겐 희소식이다. 올해 8월 말부터 방영되고 있는 SBS 예능프로그램 ‘더 레이서’는 연예인 카레이서로 잘 알려진 류시원을 주축으로 해 10명의 연예인이 레이서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다. 10월 10일부터 방송되는 SBS 예능프로그램 ‘더 랠리스트’는 한국을 대표하는 랠리 드라이버를 선발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운전 면허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카트경기는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모터스포츠다. 권보미 카트스쿨 대표는 “최근 모터스포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늘어나면서 카트를 즐기기 위해 카트스쿨을 찾는 가족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엔 ‘카레이서=폭주족’이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실제 선수들은 일반 도로에서 누구보다 안전하게 운전하는 ‘매너족’이라는 게 권 대표의 설명이다.

카레이싱을 즐기는 사람은 직접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두 갈래로 나뉜다. 경기 관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스릴감, 손에 땀을 쥐는 스피드 경쟁 등을 매력으로 꼽는다면 아마추어나 프로 레이서들은 레이싱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연구원 김모(31)씨는 “레이싱 경기를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 모두를 즐긴다”며 “특히 극한의 속도 경쟁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스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들을 볼 때 또 다른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레이싱 산업 키우기 위해선 튜닝규제 등 개선 필요
전문가들은 레이싱 산업이 커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는 “인프라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중화에 한계가 있다”며 “레저용 주행장이나 교육장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적 규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모터스포츠 산업과 관련이 깊은 ‘자동차 튜닝’에 대한 이야기다. 국내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자동차 튜닝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김필수 한국자동차튜닝산업협회 회장은 “선진국에서는 자동차 튜닝이 신기술을 확보하고 차량의 성능을 높인다고 보고 별도의 산업으로 육성할 만큼 활성화돼 있다”며 “규제 속에 정체돼 있는 튜닝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관련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 모터스포츠 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대표는 “국내 자동차 시장은 현대기아차가 시장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특별한 기술개발이나 마케팅 활동을 하지 않아도 안정적인 수요가 확보된다”며 “모터스포츠 산업의 주체가 돼야 할 국내 기업들이 해외 대회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해 앞장 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모터스포츠와 경제는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모터스포츠가 대중화되면 자동차 관련 산업이 발전한다. 국내 카레이싱 경기를 주관하고 있는 대한자동차경주협회 측은 “국내 모터스포츠를 일본 수준으로 활성화시킬 경우 시장 규모가 5000억원 이상으로 확대될 것”이라며 “일반인들도 즐길 수 있는 짐카나(복잡한 코스를 빠져나가는 자동차 경주)와 카트를 활성화시키고 각종 페스티벌,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모터스포츠 대중화에 힘쓸 것”이라고 했다.

 

[Mini  interview ● 부부 카레이서 권보미(셀린 권), 양영준 선수]

“서로에게 최고의 경쟁자이자 조력자입니다”

“경기 중에 신랑이 저를 추월하려고 하더라고요. 세 바퀴 정도 시도하다가 제가 계속 막으니까 뒤에서 쿵 박고 추월해서 갔어요. 열 받아 있는데 갑자기 천천히 달리는 거예요. 차에 문제가 생긴 거죠. 속으로 ‘아싸’를 외치며 달렸고 저는 4등, 신랑은 겨우 완주만 했어요. 저흰 승부에선 절대 양보가 없습니다. 시합 전까진 서로를 챙겨주더라도 실전에선 거침없죠.”

권보미 선수는 카레이서다운 시원시원한 성격이 돋보였다. 권 선수는 중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용인 스피드웨이 경기장에서 레이싱 경기를 한 번 본 뒤로 단숨에 카레이싱에 빠져들었다.

“경기를 보는데 남자선수들밖에 없는 거예요. ‘여자라고 왜 못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레이서의 꿈을 품게 됐죠.”

2004년 카트팀에 들어간 권 선수는 그해 코리아카트그랑프리 신인전 우승, 이듬해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림대 자동차학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자동차에 대해 공부하며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지난해 열린 CJ슈퍼레이스 1600 클래스(프로 입문 클래스)에서는 5위의 성적을 거뒀다. 1600 클래스 참가자 30명 중 여자는 권 선수를 포함해 2명이다.

남편인 양영준 선수와는 2012년에 출전한 CJ슈퍼레이스 크루즈 원메이크 클래스에서 만났다. 당시 꽤 큰 자동차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던 양 선수는 경기장에서 ‘카레이싱을 하는 여자’를 처음 만났다.

“아내와 저는 다른 팀이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였어요. 서로 치고 박고 추월하면서 경쟁했죠. 여자도 저렇게 레이싱을 할 수 있구나 놀라면서 아내의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양 선수와 권 선수는 서로에게 최고의 경쟁자이자 조력자다. 시합 전 함께 준비하고, 시합에서는 서로를 응원해준다. 시합을 마치고는 아쉬웠던 점, 보완할 점을 상대에게 얘기해준다.

“부부는 서로 통하는 게 있어야 된다고 봐요. 같은 취미를 갖고 있다면 얘깃거리가 많아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죠. ‘이번엔 앞쪽에만 타이어 새 거를 끼웠더니 좋더라’, ‘재정 형편이 안 좋으니 이번 시합은 쉬자’ 등등 정말 디테일한 부분까지 얘기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양 선수는 “대회에 참여하면 금·토·일 3일간은 경기장에서 내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남자 선수들은 아내의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가 함께 하니 문제가 없고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공유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카레이싱은 모터스포츠 중에서도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 스포츠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레이싱용 차량을 구비하는 데 3000만원가량 든다. 고속주행, 드리프트 등으로 타이어가 빠르게 마모되기 때문에 타이어 교체비용도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7차례 경기에 참여하려면 최소 2000만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모터스포츠인들은 레이싱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은다. 양 선수의 말이다.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고급 스포츠를 즐길 만큼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레이싱을 통해 느끼는 짜릿함은 돈 주고도 살 수 없어요. 출발 신호를 기다릴 때 심장이 터질 듯한 기분, 완주 후 체커기를 받고 걸어 들어갈 때 소름이 돋는 경험은 제가 레이싱에 빠진 이유죠.”

권 선수는 레이싱을 사랑하는 만큼 모터스포츠 문화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세 차례 카트스쿨 강좌를 열고 있다. 카트스쿨을 찾는 사람들은 초등학생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