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는 결혼생활 속엔 ‘남편의 결혼’과 ‘부인의 결혼’ 두 얼굴이 평행선을 그리며 마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는 결혼생활 속엔 ‘남편의 결혼’과 ‘부인의 결혼’ 두 얼굴이 평행선을 그리며 마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계노동기구는 해마다 노동시장을 향해 의미 있는 실천적 화두를 던져주곤 했는데, 최근 2~3년간은 계속해서 ‘일과 삶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영어 표현의 work life balance가 ‘일 가정 양립’으로 번역 소개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된 것은 다소 유감이다.

실상 세계노동기구가 제시한 바 ‘일과 삶의 조화’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균형을 맞추는 삶을 의미한다. 첫째는 괜찮은 혹은 격조 있는 일자리(decent work)를 갖고, 둘째는 건강한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부모역할을 수행하며, 셋째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여유로움 및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한데 우리네 상황에서 일과 삶 사이에 균형을 잡는 일은 진정 만만치 않은 과제임이 분명하다. 일단 일자리 문제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상황과 연관된 복잡한 이슈이기에 차치하고라도, 건강한 가족과 행복한 부모역할이야말로 결코 쉽지 않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과제임을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는 ‘행복한 결혼의 패러독스’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내용인 즉, 여성들은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행복을 느끼지만, 정작 결혼을 하고 보니 부부관계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여성들의 솔직한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버나드는 결혼생활 속엔 ‘남편의 결혼’과 ‘부인의 결혼’ 두 얼굴이 평행선을 그리며 마주 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21세기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란 제하에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실었던 타임지 기사에서도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은밀한 내면세계를 공유하는 가운데 포만감을 충족시켜주는 깊은 관계를 갈망하며 기대감을 안고 결혼제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담가보지만, 결혼과 동시에 친밀성을 향한 기대와 충만한 관계를 향한 갈망은 멀리 도망쳐버린다’는 우울한 전망이 소개되기도 했다.

부부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는데다 출산율 또한 1~2명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실은 건강한 가족과 행복한 부모역할 수행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가족시간(family time)’과 ‘산업시간(industrial time)’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가족시간의 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산업시간의 요구가 우선순위를 점해왔지만, 이제 남녀 공히 ‘일’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서 가족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볼 일이다.

누군가 가족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양육과 부양이 이루어지는 생존공동체이자 관계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정서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을 게다. 관건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양육과 부양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선 필히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데 이 희생과 양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의 경제활동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연스레 여성의 몫으로 할당되고 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남성에겐 실업이 문제였고 여성에겐 취업이 문제였노란 농담이 나왔겠는가.

가족시간 위한 산업시간의 양보·배려 시작돼야
가족시간은 규칙적으로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산업시간과는 특성을 달리한다. 일례로 아이의 질병은 예고 없이 닥치고 아이들 요구는 예측을 불허한다. 식탁 앞에 앉은 아이는 엄마의 출근시간을 배려해주는 법이 없고 잠 투정하는 아이 또한 엄마의 피곤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족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돌봄 노동’은 우리네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엔 틀림없으나, 생산성 및 효율성을 최우선시 하는 산업시간 내에선 사회적 보상과 개인적 보람을 보장받기 어려운 활동인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눈에 가족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 더미 속에 묻힌 작업장이 되었고, 예전의 일터는 안락하고 쾌적하며 적당한 보상이 따르는 공간이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전업주부의 기회비용은 일찌감치 취업주부의 기회비용을 능가하게 되었고, 맞벌이 부부가 규범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일 가정 양립’ 과제가 여성의 어깨 위로 부과되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과 불합리함이 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출산 문제가 이토록 심각함에도 여전히 여성의 출산이 생산력 저하와 동일시되는 현실에서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취업을 ‘빅딜(big deal)’하는 건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하루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철저히 조직에 몰입할 것을 요구하는 ‘일 중독 문화’가 고수되고 있음에, 누군들 감히 출산을 실행하겠는가?

이제부터는 ‘가족시간’을 위해 ‘산업시간’의 양보와 배려가 시작되어야할 것 같다. 더불어 건강한 가족과 행복한 부모됨을 위해 남녀 공히 희생과 헌신의 역할을 공평하게 공유하고 책임과 의무 또한 평화롭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네 삶의 질이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일 우선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가족은 물론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로움을 허락해주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 없인 가족은 부유(浮游)하고 개인은 불행하며 사회는 불안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란 경고를, 가슴 깊이 새길 때다.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족과 생애주기 그리고 세대 공존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상과 예술 속의 커뮤니케이션>(공저) <다양한 가족제도와 미완의 양성평등>(공저) <현대 한국인의 세대 경험과 문화>(공저) <60세 정년연장 의무화법에 대한 근로자 인식과 정책 니즈> <한국 가족연구 50년의 평가와 전망>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