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 13명뿐인 대법관 중에서 최근 가장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대법관을 꼽으라면 권순일(56·사법연수원 14기) 대법관이 단연 눈길을 끈다. 법조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 넣은 변호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을 이끈 대법관이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은 그의 30년 법조인 경력과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판결이다. 그와 함께 사법연수원을 다닌 동기들은 가장 권순일다운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눈치 보지 않는 점이 권순일다웠고, 대법관이 된 지 1년도 안돼 12명의 대법관을 설득한 뚝심이 그러했다. 해외사례를 판결의 주춧돌로 사용한 점도 권순일표 판결임을 증명하는 표식처럼 비쳤다.
소년급제에 이어 연수원 차석, 겸손함까지 갖춘 미소천사
전국에서 날고 뛰는 인재들이 모인 사법연수원 14기 동기 300명 중에서 대법관감을 뽑으라고 하면 이견없이 손에 꼽히는 사람이 권순일 대법관이었다고 한다.
연수원 동기들은 30년 전 연수원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차석으로 연수원을 졸업한 동기 권순일이 대법관이 될 것이라고 점쳤다. 연수원 시절부터 권 대법관은 법리에 대한 해박함과 고집, 겸손함까지 갖춰 예정된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1959년생인 권 대법관은 1977년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만에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대전고에서 후배들은 권 대법관을 ‘박사’라고 불렀다. 지역에서 유명한 인재였기 때문도 있지만 노력하는 그의 학구열 때문에 ‘천재’보다는 ‘박사’로 불렸다는 것이 대전고 출신 법조인 후배들의 증언이다. 그는 이듬해인 1981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사시를 통과해 ‘소년급제생’으로 불렸지만 항상 겸손했다. 연수원에서 나이 많은 동기에겐 ‘형님’이라는 호칭을 빼놓지 않았고 형님들이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자고 꼬시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1985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한 그는 서울고법 판사, 서울가정법원 판사, 대구지법 부장판사,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대전지법 수석부장판사, 대전고법 수석부장판사 등 각급 법원에서 여러 심급의 재판업무를 골고루 담당했다.
권 대법관은 치밀한 재판 준비와 탁월한 법리를 바탕으로 당사자들이 승복하는 합리적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법원 내에서 유명했다. 이를 인정 받아 그는 3년 동안 법원 내 엘리트 코스라고 볼 수 있는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자리를 역임했다.
권 대법관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판결에 앞장섰다. 권 대법관은 대전고등법원, 서울행정법원, 인천지방법원 등에서 행정재판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대표적인 판결은 공공건설 임대주택 임차인이 대전도시개발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비공개결정처분취소소송에서 아파트 건설원가 등을 공개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참여연대가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정보공개청구소송에서 항생제 처방률이 높은 병원들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조합이 한국토지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정보공개청구소송에서 산업시설용지 조성원가를 공개하라고 한 판결도 있었다.
또 그는 일용직 인부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최초요양불승인처분취소소송에서 서울 가락시장 일용직 인부도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고, 연세대 등 55개 사립대 학교법인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산업재해보상보험료등부과처분취소소송에서 대학교 시간강사도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는 등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도 이바지했다.
권 대법관은 또 주택의 평수에 관계없이 300가구 이상 공동주택 입주자에게 일률적으로 학교용지부담금을 부과하도록 한 ‘학교용지 확보에 관한 특례법’에 대해 평등 원칙과 비례 원칙 위반을 이유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이끌어냈다. 또 그는 교원 임용고사에서 사범계 대학 출신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가 공무담임권 및 평등권을 침해해 무효라고 판결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향한 헌법적 신념도 보여줬다.
권 대법관은 미소천사로 유명하다. 살짝 처진 짙은 눈썹은 웃을 때 경사가 더 가팔라진다. 그의 웃음은 겸손함과 친화력을 보여주는 트레이드 마크다. 권 대법관은 후배 판사나 동료 판사들과 대화할 때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없다. 법리 다툼이나 토론이 있을 때도 권위보다는 법리와 해외사례로 상대방을 설득한다. 동료 판사들도 그의 설득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연수원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한 법조인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능력을 과시하기 쉬운데 권 대법관은 본인을 과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작년 8월 2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뚜렷한 재능이 없더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법학은 적합한 학문’이라는 독일 법철학자의 글을 읽고 용기 내 법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년급제에 연수원 차석이 갖기 어려운 겸손함이다.
그의 겸손함은 친화력을 더해 설득의 무기가 됐다. 권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의 사법제도 개혁안에 대해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탁월한 조정 능력을 발휘해 법관 임용자격의 단계적 강화 및 정년 연장, 재판연구원제도의 도입,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신설 등 사법부 인사 제도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는 개선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법원행정처 차장 재직 당시에는 추진력을 더해 사법부의 오랜 염원이었던 중·장기적 사법정책과 사법제도에 대한 연구를 전담할 사법정책연구원 설립을 주도했다.

법조인은 영어에 약하다 편견 깨, 10년 내다보고 증권 박사학위까지
그는 연수원 때부터 영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다. 토론이나 발표에서 판례 분석은 물론 해외사례까지 함께 분석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연수원 동기들은 권 대법관이 법조인은 영어에 약하다는 편견을 깨고 외국문헌을 법전처럼 읽었다고 기억했다. 법조계를 뒤흔든 성공보수 무효 판결에서도 해외사례들은 판결을 떠받치는 주요 근거가 됐다.
2002년 그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증권투자권유자의 책임에 관한 연구’ 박사 논문을 소개했다. 논문을 받은 지인들은 당시만 해도 의아해했다. 권 대법관이 석·박사를 할 때만 해도 상법이나 투자자 보호는 법원에서 관심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동기 법조인은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증권투자 등에 대해 법원은 큰 관심이 없었다”며 “당시에는 의아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들보다 10년은 앞서 나갔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 논문은 증권시장에서 증권사 등 투자권유자의 책임에 관한 법리 탐구였다. 권 대법관은 1996년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2002년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2001년 인천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 논문 작성과 재충전 등을 위해 연수 휴직을 내고 1년간 미국으로 유학가 논문 집필에 집중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공법, 민사법, 비교법 분야의 각종 주요 쟁점들에 대한 논문을 30여편 저술했다.
7월 23일 법조계를 ‘충격과 경악’에 빠트린 ‘성공보수 약정 무효’ 판결은 권 대법관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눈치 안보고 밀어붙인 점과 해외사례를 들어 설득한 것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대법관이 된 지 1년밖에 안 된 대법관이 12명의 선배 대법관을 설득했다는 것이 권 대법관의 역량을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그는 법원 내 주요 보직을 역임하면서 법원의 주류적 태도를 익혔다. 이를 기반으로 대법관 12명을 설득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라는 평이다.
변호사 업계 반발이 예상되는 판결이지만 그는 소신을 밀어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애초 ‘심불(별도 이유를 적지않고 기각하는 심리불속행을 판사들이 줄여 부르는 표현)’로 묻힐 뻔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변호사와 사건 의뢰인이 성공보수를 두고 ‘내놔라’ ‘못 주겠다’며 소송을 벌인 무수한 다툼 가운데 한 사건에 불과했다. 따라서 별도의 판결 이유를 밝힐 필요도 없이 기각될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권 대법관은 예상을 깨고 대법관 전원을 논의의 장으로 소환했고, 모두의 동의와 결심을 얻어 냈다. 그는 13대 0이란 만장일치 스코어로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 금지 판례를 만들었다.
판결문에는 민일영(60·사법연수원 10기), 고영한(60·11기), 김소영(50·19기), 권순일 이름으로 보충의견이 담겼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법률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형사사건에서 성공보수 약정이 변호사 직무의 공공성을 침해하거나 사법정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법조계에서는 외국사례 분석 등은 평소 해외사례를 중시하는 권 대법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성공보수 무효 판결, 설득·고집·해외사례 권순일다운 판결
변호사 업계의 반응은 ‘분노와 절망’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평등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법률 전문가 단체가 최고의 법률 전문가들인 대법관들의 판결, 그것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 전원이 만장일치로 내린 전원합의체 판결이 사법체계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위반했다며 들고 일어선 셈이다.
판결 이유를 자세히 살펴 보면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형사 사건에 관하여 체결된 변호사 성공 보수 약정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에 위반하는 것(민법 제103조)으로 반사회질서 법률 행위에 해당돼 무효…”
대한민국 출범 이후 거의 모든 법조인들이 당연하게 요구하고, 받아 오던 ‘철칙과 같은 관행’을 ‘선량한 풍속을 위반한 반사회질서 법률 행위에 해당’한다고 정의했다. 한 마디로 ‘축첩’과 다를 바 없는 ‘몹쓸 짓’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형사 사건 재판과 관련해 성공 보수를 받아 챙긴 변호사들은 선량한 풍속을 해친 반사회질서범들이었다는 뜻일까?
대법원의 설명은 명쾌하고, 또 절묘했다. “(그동안 이와 같은 판결이 없었으므로) 선량한 풍속 등 기타 사회 질서에 반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선고를 계기로 반사회질서 법률 행위가 된다.”
성공 보수를 받아 챙긴 그간의 행위가 불법은 아니지만(소급 적용 불가), 이 판결 이후에는 사회 질서를 해치는 행동이 된다는 논리다. ‘사법 역사에 길이 남을 명판결’, ‘우리 사회 공정성 회복을 위한 결단’, ‘전관 예우 관행에 대한 대법원의 선전 포고’, ‘사법 적극주의에 입각한 기념비적 판결’, ‘사적 자치를 침해한 폭력적 판결’ 등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작년 9월 12일 취임한 그는 대법관 임기 6년 동안 한 건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5건이나 이끌었다.
‘이주노동자 노조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7년 상고심으로 넘어온 뒤 8년째 ‘감감 무소식’이던 이 사건 역시 권 대법관이 전원합의체로 가져갔고, ‘외국인 이주노동자 노조 설립은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경제계와 노동계 역시 들끓고 있다.
그와 사법 연수원을 함께 다닌 한 변호사는 “그는 좋게 말하면 ‘칼 같은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칼’”이라고 했다.
이번 판결의 사회적 결과와 역사적 평가는 법원, 검찰, 변호사 등 법조 3륜과 국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전관 예우 관행을 끊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도, 형사 사건 수임료만 확 올려버린 개악이 될 수도 있다.
“처음 판결문을 보고 무식한 판결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봐도 만용에 가까운 거친 논리로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때때로 만용을 부리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래서, 누군가가 보기 드문 위대한 판결이라고 평가한다면, 그런 평가에 대해 이의를 달지는 않겠다.”
한 저명한 변호사의 이 짧은 논평은 권 대법관의 향후 행보를 법조계와 국민들이 왜 주목해야 하는지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제 6년 임기 중 1년이 지났다. 보수파도 진보파도 아닌 정의파라는 동기들의 응원 메시지만큼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