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소닉티어의 스튜디오. 올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의 총격 장면이 나오자 총알이 궤적을 그리며 스튜디오 안을 빗발치듯 날아다녔다. 또 다른 뮤지컬 영화에선 화면 속 가수의 위치에 따라 소리가 서로 다르게 다가왔다.
이렇게 실감나는 음향은 정면의 스크린 뒤, 좌우, 후면의 좌우, 천장에 설치된 16개의 스피커군으로 입체감을 표현한 덕분이다. 스크린 영상의 움직임에 따라 입체적으로 음향을 구현했기 때문에 토네이도의 바람소리가 멀리서부터 휘돌아 나와 관객의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하는 등 화면내부가 아닌 관객이 앉아있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들린다.
최근 제작되는 영화는 아예 제작단계에서부터 이런 사운드 시스템 설계에 따라 녹음을 진행하고, 후반 작업을 통해 특화된 사운드 효과를 넣는다. 따라서 관객은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실감나는 음향 체험을 할 수 있다.이러한 입체음향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돌비, DTS, 오로, 소닉티어 등 전 세계적으로 4개사 정도다. 이중에서 돌비 같은 세계적인 기업과 기술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국내 벤처기업이 소닉티어다.
소닉티어는 2012년 9월 ‘광해-왕이 된 남자’를 시작으로 최근의 ‘명량’, ‘국제시장’, ‘암살’, ‘베테랑’ 등 30여편 이상의 한국 영화 음향을 담당했다. 또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 CGV여의도 9개 전관을 비롯해 국내 15개 영화관에 소닉티어 음향시스템을 설치했다.
박승민 소닉티어 대표는 “대부분의 영화관은 스크린 바로 뒤, 좌우 벽, 뒤쪽 벽 등 다섯 구역에 배치된 스피커와 우퍼(저음 재생 스피커)로 구성돼 있는 ‘5.1 채널’의 음향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이 시스템은 모든 객석에서 일정한 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닉티어의 음향시스템은 5.1 채널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영화관 천장과 사방에 스피커를 배치한 ‘16 채널’이나 ‘32 채널’로 영화 속 소리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뒤쪽에서 자동차가 출현하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식으로 현장감을 살려줍니다.”
스튜디오 장비 설계자였던 박 대표는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아트를 전공하면서 입체음향을 접했다. 2000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게임기 ‘X박스’에 들어가는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로 3년간 일했다. 2003년 귀국한 그가 소닉티어를 창업한 것은 2011년. “귀국 후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관련 일을 했어요. 어느 날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주인공이 있는 위치에서 소리가 나면 입체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바로 이러한 기술 관련 특허를 검색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세계의 음향시장은 돌비가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돌비에 지급되는 한 해 로열티만 해도 3000억원이 넘었어요. 그걸 안 순간, 갑자기 오기가 생겼어요. 우리나라에선 누구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을 내가 해보자, 원천기술을 개발해 해외로 유출되는 국부를 지키자, 그런 각오였죠.”
필요한 자금은 벤처캐피털 등으로부터 유치했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60억원을 조달했다. 자금유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는 김대진 부사장. 김 부사장은
박 대표의 형과 30년 지기 친구다. 체이스맨해튼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서 20여년을 거친 금융전문가였던 김 부사장은 박 대표의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바로 합류했다. 인터뷰에 배석했던 김 부사장은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이건 되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술개발이 문제였다. 수십년간 음향기술 개발 노하우를 쌓아온 돌비를 따라잡을 기술을 이제 막 창업한 벤처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이때 구세주로 나타난 곳이 전자통신연구원(ETRI)이었다. ETRI는 소리를 압축하는 코덱과 관련된 원천기술뿐 아니라 국제표준특허도 갖고 있었다. 소닉티어는 ETRI와의 협업을 통해 차세대 다채널 오디오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자연음에 가까운 최대 32채널 포맷을 지원한다. 기존 영화관 장비와 호환도 가능하다.
돌비 등과 기술표준 경쟁
소닉티어는 돌비 등과 음향 믹스(음향을 나누고 섞는 기술) 기술 표준 경쟁을 하고 있다. 기술표준은 극장이 누구의 음향시스템을 채택하느냐에 달려있다.
박 대표는 “국내 극장의 음향시장을 뚫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국내 5.1 채널 음향시장은 돌비가 장악하고 있었어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죠. 2년 동안 국내 대부분 극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어느 곳도 선뜻 나서지 않았어요. 그래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시연하고, 설득했죠.”
그의 끈질김에 결국 CGV가 응답했다. 마침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던 CGV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타임스퀘어 스타리움관을 16채널의 입체음향시스템으로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스타리움관은 일종의 테스트베드였다.
CGV의 만족도는 어땠을까. 박 대표는 “이후 CGV가 IFC에 들어서는 CGV여의도 9개관 전체에 소닉티어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사운드X’라는 사운드 특화관으로 홍보하는 것에서 알 수 있지 않냐”며 웃었다.
최근 입체음향시장에서 소닉티어의 입지는 넓어지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달 동안 8개 극장의 음향시스템 설치사업을 따냈고, 연말까지 10개관을 추가할 예정”이라며 “중국을 시작으로 해외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