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루스 해협은 석양이 질 때 아름답다. 크루즈 선상에서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맞았다.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보스포루스 해협은 석양이 질 때 아름답다. 크루즈 선상에서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맞았다.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이스탄불 탁심 신시가지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그랜드 하얏트 호텔 849호실, 석양의 햇살을 받아 해협 건너편의 아시아 쪽 풍광이 눈부시게 푸르고 가슴 시리도록 아련한 정경이 펼쳐지는 이곳, 이 시간 나는 상념에 젖어 있다. 간밤에는 기슭을 치는 파도소리에 밤을 뒤척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본래의 삶인지 또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생각의 실타래를 풀었다 감았다 했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도 가볍다. 그것은 죽음을 이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궁형(거세형)의 치욕을 감내하면서 위대한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의 생사관이다. 결국 어떤 삶을 영위했느냐가 죽음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리라.

이즈미르에서 다시 이스탄불로 온 지 이틀째다. 어제(2013년 5월 14일) 오후 호텔에 체크인한 후 곧바로 보스포루스 해협 석양 크루즈에 나섰다. 날씨는 본격적인 늦봄으로 접어들어 4일 전 떠날 때보다 더웠다. 이스탄불에서 ‘서울에너지’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차아르 사장이 부인과 함께 호텔로 우리를 픽업하러 왔다. 차아르씨는 앙카라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를 한 덕에 친한파가 되어 있었다. 한국이 좋고 다시 가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얘기한다. 돌마바흐체 궁전 부근 선착장에 가니 터키의 국제 문화교육지원시스템(PASIAD)의 사무총장인 에르신씨가 요트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충남대학교에서 유학했다는 오마루군이 통역 겸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해질 무렵 2시간의 보스포루스 해협 크루즈가 시작되었다.

석양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름답다 못해 질투가 서릴 만큼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천상의 속삭임을 느끼는 매력적인 항구의 노을과 낙조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나는 이른바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꼽히는 시드니, 나폴리, 리우 모두 가봤지만 소문만큼 그다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나더러 세계 제일의 미항을 들라면 주저 없이 이스탄불을 꼽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했더니 터키 친구들이 좋아라한다.

에르신씨는 우리에게 보스포루스의 명승(名勝) 포인트와 그 유래를 차분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저녁식사가 선상에서 준비되었다. 귀한 생선요리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요트 위에서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며 드는 만찬은 음식맛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 사이의 훈훈한 정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2013년 5월 15일 오늘은 우리 부부가 인연을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러한 사실을 얘기했더니 이 터키 친구들은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다. 조그만 케이크에 30개의 예쁜 촛불을 붙여 내놓으면서 축하의 간단한 세리머니를 펼친다.

보스포루스 해협 선상에서 맞은 결혼 30주년 깜짝 이벤트
우리 부부는 오늘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것이라면서 거듭 고마운 정을 표출했다. 한국도 아닌, 내가 가장 아름다운 항구로 손꼽던 이스탄불, 석양의 보스포루스 해협의 선상에서 맞는, 그것도 처음 만난 터키 친구들로부터 결혼 30주년 기념 이벤트를 선사받은 것은 우리 부부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고마운 친구들이고 터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을 고무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2시간여에 걸친 요트 유람을 마치고 차아르씨는 우리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면서 내일 저녁 시간이 괜찮다면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정중히 다음 기회를 약속하면서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오늘 오전 6년 전에 왔을 때 두 차례 찾아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던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한 톱카프사라이의 그 식당을 다시 찾았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잠시 해협의 장관을 바라보다가 표표히 발길을 돌렸지만 그 수려하고 애틋한 해협의 정경만은 변하지 않았고 더 진하게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다. 톱카프사라이를 나와 갈라타 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햇살이 좀 따갑기는 했지만 걷기에는 괜찮은 날씨다. 갈라타 다리 식당에서 고등어 샌드위치와 케밥을 시켜 맥주 한잔을 곁들였으나 6년 전 맛보았던 그 맛은 아니었다. 그러려니 하면서 갈라타 다리를 건너 탁심 시가지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탁심 못 미쳐 골목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바로 갈라타 탑 앞에 이른 것이 아닌가. 목표를 정하고 온 것이 아닌지라 반가운 마음에 탑 위에 올랐다. 탑은 67m지만 엘리베이터와 나선형 계단으로 53m 높이에 있는 360도 회전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스탄불 시내와 보스포루스 해협 전경이 훤하게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골든혼의 모습이 확연하게 정리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당시 메흐멧 2세가 썼던 배를 산으로 올리는 전술의 형태가 이해되었다. 그는 바로 이 갈라타 언덕을 넘어 하룻밤 사이에 72척의 배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혼 쪽으로 옮김으로써 세계사를 바꿨다.

원래 갈라타 탑은 6세기 초 등대로 만들어졌던 것을 14세기 제노바인들이 비잔틴 제국을 감시하는 탑으로 개조했다. 현재의 탑은 14세기 이후 손실된 것을 개조한 것이다. 탑 맨 위층의 레스토랑에서 커피와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들면서 걷기에 지친 몸을 달랬다. 갈라타 탑에서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 왼쪽으로 약간의 비탈길을 끼고 오르자 드디어 탁심거리와 마주친다. 탁심은 이스탄불 신시가의 상징이자 젊음의 거리, 역동의 거리이다. 이스탄불은 사람의 물결이 도시 전체를 휩쓸고 있는 것 같다. 톱카프사라이에서 갈라타 다리로 내려오는 길, 갈라타 다리 위 아래층의 거리, 갈라타탑에 오르는 길 모두가 온통 사람 천지다. 6년 전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이 오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터키 경제와 사회의 역동과 활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스탄불은 만원이었다. 역사 회고와 사색에 잠기려는 나그네에게 여유를 주기에는 너무 들뜬 분위기다. 탁심 중심가의 한 오래된 책방에서 오스만제국 때의 세계지도 복사본 한 장과 1875년 런던에서 간행된 <Bible land and Customs>이라는 책 한 권을 구입했다. 얼핏 보니 오스만제국의 생활습관, 동식물의 생태 등을 다루고 있다.

루멜리 히사르 성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루멜리 히사르 성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이튿날 호텔 체크아웃 후 근처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았다. 이번이 세 번째다. 오스만 제국의 중흥을 바라고 지은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한 유럽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끝내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지 못한 채 제국의 황혼과 함께 사라져간 비운의 궁전. 1856년 술탄 압둘메짓이 톱카프궁전을 떠나 이곳으로 옮겨 올 때 이미 오스만 제국의 명운이 다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285개 방의 실내장식이 각각 다를 만큼 궁전 내부의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숨을 거둔 방을 이제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6년 전 왔을 때와는 달라진 장면이다. 이어 15분을 흑해 쪽으로 차로 달려서 루멜리 히사르(성)에 당도한다.

메흐멧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 위해 그의 충복인 세 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곳에 있는 아나돌루성 건너편에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라고 명했다. 세 장군은 불과 넉 달 만에 이 성채를 완성했다. 이 성채가 완성되고 1년 후인 1453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그 수명을 다한다. 망루가 있는 성채 안은 서늘한 기온에 웅장한 원형돔을 연상시키는 자태를 하고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원형극장과 이슬람 모스크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1452’라는 돌로 된 숫자가 눈길을 끌었다. 1452년은 루멜리 히사르가 만들어진 해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돌마바흐체 궁전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승자도, 패자도 역사의 한 페이지 기록
탁심거리 중심가 도쿄 스시집에서 일식으로 점심을 먹고 갈라타 다리를 건너 바로 왼편에 있는 동방정교회 총본부 사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종착역이자 시발점이기도 했던 사르케지역, 이어 과거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이스탄불의 물산집산지로서의 명성을 간직한 그랜드 바자르를 통과의례로 훑어보았다.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서는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일 상황을 파노라마 전경으로 볼 수 있다.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서는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일 상황을 파노라마 전경으로 볼 수 있다. <사진 :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드디어 이번 여정의 대단원을 장식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콘스탄티노플 성채였다. 먼저 ‘1453 파노라마 박물관’에 들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일 상황을 파노라마 전경으로 특수음향 전자장치를 동원해 재연해 놓은 웅대한 장면을 본다. 2층의 파노라마실에 오르면 타임머신을 타고 가 마치 그날의 성 함락 장면을 직접 생생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의를 걸친 채 백마 위에서 우람한 자세로 전투를 지휘하는 메흐멧 2세의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박물관을 나와 성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난공불락의 성채로 알려졌지만 술탄의 군대에게 무너져 폐허로 남은 쓸쓸한 자태를 접하니 이긴 자와 진 자 모두 어디로 갔는지, 역사의 섭리에 겸허한 마음이 들 뿐이다. 승자인 메흐멧 2세도 패자인 콘스탄티누스 12세도 사나이답게, 술탄과 황제답게 제 역할을 다했고 역사의 떳떳한 페이지를 기록했다고 본다. 11개의 성문과 192개의 성탑을 거느리고 마르마라 바다에서 골든혼까지 6.5km에 걸쳐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그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폐허로 변해 집시들의 은신처로 전락한 콘스탄티누스 성벽, 그 성벽의 중심부에 서서 멀리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역사와 인간사의 무상함에 마음은 천리만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이제 방랑의 여정도, 꿈과 낭만을 좇던 시간도 마칠 때가 되었다. 계속 나그네 길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이석연 변호사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는 역사와 인문학에 해박한 여행전문가다. <책, 인생을 사로잡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늦지 않았다>, <사마천 한국견문록>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이 글은 터키와 이집트를 여행하며 현장에서 직접 쓴 여행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