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프린스턴·MIT·펜실베이니아 등의 대학에 동시에 합격했고, 그 중 하버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는 합격생 중에서도 톱에 속하는 각각 ‘전국 장학생(National Scholar)’과 ‘벤저민 프랭클린 장학생’에 뽑혔다. 이 모든 것은 9살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소년이 해낸 일이다.
자신의 삶을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란 책으로 펴낸 신순규 애널리스트가 2주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11월 16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서울 광화문 덕수궁 돌담길에서 신순규씨를 만났다.

하버드대학 심리학 박사, 메사추세츠공과대학 (MIT) 경영학 및 조직학 박사 학위를 따내고 JP모건에 이어 1998년 미국 최대 투자은행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의 애널리스트가 된 신순규씨. 그는 9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1급 시각장애인으로 빛 한줌도 볼 수 없다.
신순규 애널리스트는 “가끔 출근할 때 길을 잃기도 하고, 검토해야 할 자료가 담긴 문서가 잠겨 있다든지 하면 스크린리더(화면의 내용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프로그램)로 못 읽기 때문에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든지, 이럴 때 외에는 크게 불편함은 못 느낀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놀랍게도 그는 뉴저지 북부에 있는 집에서 직장인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이 있는 월가까지 약 1시간 반 거리의 길을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점 중 하나다.
“와이프가 집에서 3분 거리인 기차역까지 데려다주면 캐인(시각장애인용 지팡이)을 사용해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월가 근처의 펜 스테이션에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면 1시간 20~30분 정도 걸립니다. 펜 스테이션에는 워낙 사람들도 많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부딪혀서 그동안 지팡이를 세 개 정도 부러뜨렸어요. 처음에는 당황했었지만 이젠 여유 지팡이를 한 개 더 갖고 다니죠. 혼자 출퇴근 한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신기해하시는데, 아마도 출근 전에 제가 하는 마음의 준비운동, 수많은 반복으로 익숙해진 길, 그리고 가끔 저를 도와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의 손길 등을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예요.(웃음)”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게 된 후 그의 어머니는 가장 먼저 피아노를 가르쳤다. 시각장애인들이 흔히 하는 안마나 침술 대신 음악 선생님이나 음대 교수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을 해 주지 않겠다는 선생님 집에 찾아가 갓난아이를 돌봐주고 콩나물을 다듬어주며 레슨 수업을 해 주겠다고 할 때까지 갖은 애를 다 쓸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만 열다섯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피아노를 배운 덕분이었다. 연합세계선교회라는 단체가 주최하는 캠프에 참석해 연주를 하고, 그 때 만난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 전역에 공연을 다니면서 미국의 오버브룩 맹학교로부터 유학 초청을 받게 됐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유학길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여러 가지 꿈을 마음에 품으면서 살았던 버릇 때문에, 유학을 온 이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여러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장애인 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와 미국 일류 대학에서 공부하고, 월가에서 직업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요. 저는 많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꿈은 크면 클수록 좋고,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어야 한다고. 예를 들어, 성공한 식당 경영자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그 식당을 물려받을 생각을 하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그 식당에 접시 닦는 직원이 그 식당을 언젠가 인수하겠다는 야망을 품는 것, 그것이 바로 꿈다운 꿈이라 할 수 있죠. 이런 꿈이야말로 무지개 너머에 있는 나라, 이상대로 마음껏 살 수 있는 나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날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좋은 일을 가지는 것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아닐까. 어릴 적부터 자신과 ‘인연의 줄’이 묶여있는 이를 만날 것이라고 믿어왔던 그는 아내를 뉴욕 밀알 장애자 선교회라는 모임에서 알게 됐다. “전 결혼도 참 잘 했어요”라며 아내와의 연애 스토리를 들려주던 신순규씨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와이프는 물론 어렵게 얻은 아들, 그리고 입양한 딸 이렇게 네 가족이 그의 ‘완전체’다. 시각장애인이 애널리스트로 일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하지만, 그는 “그보다 먼저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에 유학 왔을 때 선교사가 잠깐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으로 저를 맡으셨다가 그 인연으로 저를 자식처럼 키워주신 두 번째 맘과 대디가 있습니다. 대디는 저에게 ‘You are not handicapped, You are handycapable(너는 장애인이 아니야. 유능한 사람이지)’이라고 얘기해 주셨어요. ‘핸디케이퍼블(handycapable)’이라는 말은 영어 사전에 없습니다. ‘손재주’, ‘좋은 솜씨’를 뜻하는 ‘핸디(handy)’라는 단어와 ‘유능한’이란 뜻이 있는 ‘케이퍼블(capable)’을 합쳐서, ‘장애’를 뜻하는 ‘핸디캡트(handicapped)’와 비슷하게 대디가 만든 새로운 단어였죠. 대디가 날 위해 만든 이 한마디 말에, 놀랍게도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매달 열리는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갈 수 있었고, 학생 뮤지컬에도 출연했고, 학생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신씨와 같은 시각 장애인들이 어떻게 컴퓨터를 쓰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쓰는 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와 똑같은 것이지만 반드시 스크린리더를 꼭 설치해야만 한다. 스크린리더가 출력하는 정보를 귀로 듣고 손으로 읽으며 일한다.
“시각장애인 애널리트스가 없다는 사실이 이 직업에 도전하게 만들었다”는 그는 애널리스트로서 2003~2006년까지 펀드수익률 상위 10%를 기록하기도 했다. 신씨는 “시각장애인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권리를 잃은 사람이다.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거부할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사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눈빛, 외로움으로 어두워진 배우자의 얼굴빛과 같이 정작 중요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삽니다. 덜 보아야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