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23장에는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풀이는 이렇다.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은 치곡의 문제이다. 그것은 소소한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극하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소소한 사물마다 모두 성이 있게 된다. 성이 있게 되면 그 사물 내면의 바른 이치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형상화되면 그것은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드러나게 되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움직인다. 움직이면 변한다. 변하면 화한다.”

영화 <역린>(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에서는 이리 말한다.

“오직 천하의 지성이래야 능히 화할 수 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외식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곡능유성’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훌륭한 재료는 기본이고 이를 다루는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또 한 가지, 바로 예술 감각이다. 이들은 그림과 글에 능하다. 국가대표급 셰프, 최현석씨에게 그림을 받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하도 궁금해서 여경래 사부에게도 그림을 부탁한 적이 있다. 만화가 뺨치는 스케치가 그의 불도장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런가 하면 글재주가 뛰어난 이들도 많다. 그 중에서 오늘은 강남 최고의 한정식 집으로 불리는 대장금의 김인숙 대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프로듀서 시절이던 1997년 상견례를 앞두고 수소문을 했다. 양가 어르신들이 만족할 만한 곳이 어딜까? 음식 좀 먹는다는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토방’을 꼽았다. 서울에서 남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이라며. 그날 네 분은 음식에 반하고, 가양주에 취해 가족이 되었다. 한동안 이 집을 잊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꽤 바삐 살던 즈음에 한의사 한 분이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신라호텔 바로 옆 대장금이 약속 장소였다. 슈트를 차려입은 외국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갈하고 섹시한 음식에 흠뻑 빠져 있는데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식사에 초대한 의사 선생이 미리 언질을 한 모양이다.

“칼럼니스트시라고요? 제 음식이 어떻습니까?”

그녀의 음식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에 눌려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대답을 이어가는데 흐릿하지만 기억이 난다.

“혹시 삼성동에서 ‘토방’을 운영하지 않으셨는지요?”

대답 대신 빙긋 미소가 날아 온다. 이게 얼마만인가? 워낙 강렬한 인상이라 기억을 되돌릴 수 있었다. 강남 바닥을 호령하던 토방의 주인장. 범접할 수 없는 미모의 여사장과는 이렇게 두 번째 조우가 이루어졌다. 당시 장충동 ‘대장금’의 인기는 대단했다. 외식업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식당 때문에 근처 호텔 한식당이 기를 못 편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을 정도다. 오죽했으면 MBC에서 ‘대장금’ 상호 공식 라이선스 계약을 했겠는가! 김인숙 대표는 1등이 되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다고 한다. 결혼과 동시에 세계적인 유아교육업체 ‘프뢰벨’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1등 성적표를 받는 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불꽃같은 기세였다. 비결을 물었다.

“매일 일지를 작성했어요. 1등과 2등 그리고 꼴찌를 관찰한 기록을 매일 적었어요. 좋은 점은 그대로 따라했죠. 나머지는 전부 버렸습니다.”

대장금 곰쿡 김인숙 대표는 아무나 만들 수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원칙으로 수입육보다 10배 가까이 비싼 국내산 고기와 뼈를 쓴다.
대장금 곰쿡 김인숙 대표는 아무나 만들 수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원칙으로 수입육보다 10배 가까이 비싼 국내산 고기와 뼈를 쓴다.

1등 따라하고 꼴찌 되는 법 버려라
일찌감치 최고가 되는 법을 터득한 그녀가 외식업에 뛰어든 건 1993년. 손님들이기 좋아하고, 해 먹이기를 즐기던 그녀가 선택한 건 고향인 전남 부안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었다. 그렇게 장을 만들고, 김치를 담고, 고기를 삶고, 생선을 구웠다. 김 하나도 대충 내지 않았다. 400장을 일일이 손으로 찢어서 직접 덖었다. 소스 하나, 양념 하나, 약을 달이듯 음식을 만들었다. 이런 정성이 드러나고 감동을 만들었다. 오픈하자마자 강남 최고의 상견례 장소로 이름을 얻었다. 저녁이면 관공서와 기업체의 회식으로 늘 만석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 하나까지 정성을 다하자 돈은 절로 굴러들어왔다. 주변에서 하나 둘 쓰러지는 외환위기 때도 호황을 누렸다. 가족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내던 선후배를 보내는 마지막 회식자리로 토방을 선택한 덕분이었다. 울음바다가 된 송별회에서 그녀도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눈가를 훔쳤다. 맛있는 밥을 해 먹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처럼 지내던 단골을 하나 둘 떠나보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한바탕 몸살을 앓고 난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람 떠나보내기가 너무 어렵다고. 토방을 맡아달라고. 천사 같은 남편은 두 말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1등이라면 자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고배를 마셨다. PC방 사업이 만만치 않았다. 10억원 가까운 투자금을 홀라당 까먹고 남편 곁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사는 적성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성적이 좋은 법이다. 이때 그녀의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송곳 같았던 성격은 둥글해졌다. 기고만장하던 성질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각오를 다졌다. 음식을 파는 주인장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음식’을 만들겠노라고. 점찍어두었던 장충동 요정을 인수하고 대장금을 차렸다. 물 만난 고기 같았다. 흥에 겨워 요리를 만들었다. 춤을 추며 음식을 날랐다. 유명 주방장들이 찾아와 소스의 비법을 물었다. 사람 됨됨이가 괜찮으면 간 쓸개 다 내주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는데 적이 늘어났다. 비방하는 이도 생겼다. 육신은 괜찮은데 정신이 지쳐갔다. 마침 건물주가 리모델링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핑계 삼아 장충동을 떠났다.

김인숙 대표는 지금도 매일 SNS에 직접 쓴 시 한편과 함께 레시피를 올린다. ‘집밥 백선생’ 마냥 일반인용이 아니다. 자영업자들이 보면 정말 도움이 될 23년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은 거창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다. 주인장이 음식을 모르면 망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직접 주방에 들어가지는 않아도 식재료와 조리법을 알아야 장거리를 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아이돌 저리가라 할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강남과 강북을 오가며 최고의 한정식이라 추앙받던 대장금이 왜 갑자기 곰탕을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장충동을 떠나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식에 족적을 남겨야겠구나. 가장 기본인 설렁탕, 곰탕, 갈비탕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배우러 다녔죠.”

그렇게 남의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주인도 주방 식구들도 문을 굳게 닫았다. 한정식집 사모님이 설렁탕을 배우겠다고? 반 년 가까이 주방에서 버텼다. 멀쩡한 식당 놔두고 무슨 짓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꼭 한 가지는 남기고 싶었다. ‘김인숙표 곰탕’. 창피하지도 않았다. 배우는 게 마냥 즐거웠다. 주방 식구들의 마음을 사는 데는 밥이 최고였다. 직원들 식사 준비하는 게 가장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다. 말없이 나섰다. 직원 식사를 요리처럼 만들어냈다.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성지 순례하듯 탕 집을 돌았다. 삼성동과 장충동을 거느리던 요리 아티스트는 어느덧 곰탕의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2013년 3월. ‘대장금 곰쿡’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재오픈을 했다. 탕반 문화를 새롭게 쓰고 싶다는 그녀의 꿈이 시작된 날이다. 한정식 대신 선택한 곰탕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돌아온 탕아, 김인숙의 한정식을 기대했던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남도 한정식이 먹고 싶어왔는데 곰탕이라니! 발걸음을 돌리는 이가 늘어만 갔다. 당장은 겁이 났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보이려 노력했다. 그만큼 탕에 집중하고 싶었다.

“제가 송별회를 해드렸던 분들이 예약 전화를 하면 한정식을 내드렸어요.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병행하고 있고요.”

대장금 곰쿡의 탕이 소문나자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외식관련 잡지들에서 탐방 팀을 만들어 취재도 했다. 사용하는 100% 국내산 재료를 보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리 힘든 작업을 하냐며 수군대기도 했다. 아랑곳 하지 않았다. 수입육보다 10배 가까운 원가가 드는 국내산 고기와 뼈를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나 만들 수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원칙 때문이다. 이런 꼬장꼬장한 주인과 함께 일을 하면 피곤하기 마련. 그런데도 이 집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도대체 비법이 뭘까? 다른 자영업자들은 사람을 못 구해서 피눈물을 삼키는데 말이다.

원가 비싼 국내산 고기와 뼈 고집
“직원들의 능력이 다들 다른데 대개 업무지시를 무턱대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일을 부여해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바쁜데 육수 떨어졌다고 하면 낭패거든요.”

똑같이 일하고 나서 직원들의 식사까지 작품처럼 준비하는 그녀를 보면서 다들 혀를 내두른다. 존경심은 강요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요즘 세상에 직원들을 위해 하루 2시간씩 무조건 할애하는 사장이 어디 있겠는가. 체계적인 지시와 후덕한 인심 덕분에 일용직 가사도우미가 직원이 되는 곳이 대장금 곰쿡이다.

요리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이의 대답은 간단하다. 아름다움은 억지로 만들면 어색하고 역겹다고. 정직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는 현답을 내민다. 그래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었다. 사소한 것에 지극 정성을 다하고, 1등이 하는 걸 관찰했다가 그대로 흉내 내고, 가까이 있는 식구들에게 마음을 주고, 정직하면 되는 것. 그런 김인숙을 마치 돌부처처럼 천사처럼 지켜준 이가 그의 남편이다. 외식경영학 박사까지 취득하면서 그녀를 소리 없이 응원하고 있다.

노을을 따라 서쪽으로 비행기 여행하는 게 꿈이었던 부안의 소녀는 이제 다른 꿈을 꾼다. 절대 망하지 않을 서른 명의 후배를 찾고 있다. 평생의 노하우가 담긴 곰탕 기술을 전수해 줄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 외식사관학교를 짓고 싶어 한다. 고문 자리도 교장 자리도 필요 없다. 1년 딱 열두 ‘놈’을 가르칠 생각이다. 그 중 도망가지 않고 평생 한식을 지킬 세 명만 건지면 행복하겠단다. 그 ‘놈’들에게 모든 걸 전해주고 노을과 함께 떠나는 게 김인숙의 꿈이다.

▒ 김유진 
김유진 칼럼니스트는 국립중앙박물관 식음료 총괄 컨설턴트, 신세계 백화점 F&B 자문을 거쳤으며 KBS ‘아침마당’, MBN ‘알토란’, KBS 라디오 ‘성공예감 김원장입니다’ 등에 출연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나도 부자될거다>, <장사의 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