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18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에는 고급스런 호텔이 새로 들어섰다. 객실 인테리어에 유명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고 해 이미 화제가 되고 있던 곳이다. 호텔 내부와 객실의 콘셉트는 젊은층은 물론 트렌디한 감각을 가진 비즈니스맨들을 철저하게 겨냥한 느낌이 다분하다. 이런 젊고 감각적인 호텔의 소유주는 일흔을 훌쩍 넘긴 이영자 회장(74)이다. 이 회장은 “유행이 빨리 바뀌는 옷 만드는 일을 오래 해오다보니, 아무래도 유행에는 민감한 편이다. 요즘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늘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지난 해 새로 지은 이 회장의 자택도 호텔 못지않은 인테리어와 전경으로 화보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이 회장은 “마침 집 지하에 스튜디오가 들어와서 연예인들이 자주 옵니다. 야외 정원에서도 종종 화보촬영을 하더라고요”라며 웃음을 보인다.
이 회장은 그 나이에 흔치 않은 ‘자수성가형 여성 사업가’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종종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여러 번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 적이 적지 않았다. 조부모는 늘 “니 애비는 닮지 말아라”는 말로 ‘자식 교육’을 대신했다.
“아버지 때문인지 철이 참 일찍 든 편이었어요. 어머니가 속으로 많이 화를 삭이셨죠. 외가가 있던 전북 김제에서 여상을 다니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눈에 띈 것이 편물학원(뜨개질)이었어요. 그러면서 섬유 계통에 눈을 뜨게 되었죠. 겨울 한 철 열심히 벌면 먹고 살기는 괜찮았었어요.”
남대문·동대문에서 장사 시작

본격적으로 사업에 도전하게 된 것은 결혼 후 남편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위기가 오히려 그를 사업가로 변신하게 만든 기회가 된 셈이다. 편물학원을 다니며 시장 밑바닥부터 장삿속을 익혔던 그는 내재돼 있던 사업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장사를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서울에 집 한 채를 장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타이밍을 보는 눈도 정확했다. 중국, 일본 등지에 원단 수출까지 하면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이 호텔을 지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자신을 고생시킨 남편도 이제는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곧잘 하던 아들 김성수씨는 서울대(경제학과) 졸업 후 산업은행, 금융연수원 등을 거쳐 현재 사장직을 맡아 어머니를 돕고 있다. 일평생을 남대문, 동대문에서 옷감을 만지며 살아왔던 그가 호텔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얼까.
“돈은 벌었지만 그만큼 대가도 많이 치렀어요. 암수술도 하고, 남편과 한때 이혼 위기를 겪기도 했고요.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마지막 투자를 어디에 해볼까 고민하다가 이 자리가 눈에 띄더라고요.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제 나이가 있으니 한 4~5년만 제가 맡고, 그 이후는 직원들 스스로 키워갈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그만큼 인센티브를 주려고 하고요. 내 마지막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든 겁니다. 동대문 원단 장사도 아직 그대로 하고 있어요.”
더 디자이너스 강남 호텔은 인테리어에 남다른 신경을 쓴 곳이다. 객실마다 다른 콘셉트를 반영해 모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객들이 방을 번갈아 가면서 묵어도 모두 다른 느낌의 호텔을 ‘체험’할 수 있다. 가수 김완선·강수지씨가 디자이너에 참여한 것도 업계에선 화제가 됐다. 어떤 계기로 콜라보레이션(협업)을 하게 된 걸까.
“호텔 더 디자이너스 삼성점에서 김완선씨에게 뮤직비디오 촬영장소를 제공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만남이 인연이 됐고, 김완선씨가 워낙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고 본인 집도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집을 보니 정말 남다른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하게 됐죠. 김완선씨가 이후 강수지씨를 소개해 두 분이 같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소품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만큼 정말 열심히 해주셨어요.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덕에 방도 아주 다른 콘셉트로 멋지게 완성됐고요.”
김완선씨가 디자인한 방은 우아한 분위기의 휴양지풍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고, 강수지씨는 아기자기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강지유·김신혁 디자이너 등 각 방의 인테리어에 모두 다른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이 호텔의 강점은 특히 비즈니스를 위한 남성 고객들의 편의에 보다 신경 썼다는 점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이라는 제목을 가진 룸은 철저히 남성들을 겨냥한 방이다. ‘추억의 웨스턴 무비여행’이라는 콘셉트로 만들어진 이 방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서부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방을 들어서는 순간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확 와 닿는 곳이다. 함께 갔던 남성 사진기자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안내하던 매니저는 “남성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방으로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남성 고객들에게 ‘특화’된 객실과 서비스
남성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하 3층의 ‘엘 스프링 스파(eL Spring Spa)’는 ‘남성 전용 사우나’로 꾸며졌다. 바쁜 사회생활로 지친 아버지, 가장들을 위한 공간이다. ‘남성 전용 마사지샵’인 ‘Real Man’s Healing Spot’도 남성들만을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이외에도 지하 2층에는 스낵 바, 영화관람실, 수면실이 마련돼 있어 잠깐 들러 쉬기에도 제격이다. 이미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곳은 객실 예약이 힘들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객실마다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다보니 연예인 화보촬영도 종종 이어지고 있다. 중국 최대의 SNS채널 웨이보는 물론 중국 패션 파워블로거들 사이에서도 핫플레이스로 소문났다.
이영자 회장은 호텔을 운영하며 파격적인 또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고객들의 편의와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분당 요금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 호텔의 문턱을 낮추고 젊은 고객층도 유치하기 위한 전략이 담겨 있다. “야근 후에 호텔에 와서 쉬고 다음날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들, 또 친구들과 오붓하게 호텔에서 저녁 모임을 가지고 싶은 고객들에게 기존 호텔 요금은 너무 부담이 되는 가격이죠. 기존의 호텔요금제와 달리 이용한 시간만큼만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그 생각을 실제 요금에 적용시킨 분당요금제를 실시하게 됐습니다. 객실마다 단가가 다르지만, 실제 이용한 시간에 맞춰 객실료가 지불되다보니 보다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도 우리 호텔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