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7월 글로벌 호텔 체인 ‘힐튼’의 상속녀인 니키 힐튼의 결혼식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니키 힐튼의 결혼 상대가 바로 세계적인 금융 재벌로 잘 알려진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계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로스차일드였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부유한 상속녀인 니키 힐튼을 ‘현대판 신데렐라’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천억원의 재산을 가진 힐튼의 상속녀조차 가난한 신데렐라로 보일 정도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과 부(富)가 엄청나다는 뜻이다.
독일계 유대인 가문인 로스차일드가(家)는 250여년간 이어져온 금융 재벌로, 전세계 정부를 움직이는 ‘검은 배후’로 끊임없이 지목됐다. 유대인 출신 의장을 통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장악했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 이스라엘 건국, 러시아 혁명, 영국 산업 혁명, 수에즈운하 건설 등 전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준 사건에도 로스차일드의 이름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 외무 장관인 아서 밸푸어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이스라엘 건국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이스라엘 건국에 힘을 보탠 것으로 전해진다.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막강한 재력에서도 드러난다. 로스차일드가의 소유 기업들은 대부분 비상장이어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규모를 추정하기 힘들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빈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이 50조달러(약 5경원·1경=1만조원)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참고로 지난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8조1247억달러다. 제1의 경제대국의 3년 가까운 GDP를 1개 가문이 가지고 있다.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흑막’으로까지 불리는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로스차일드가는 막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정부 기관에 돈을 대출해주거나 국공채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형성했다. 금융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아내 투자에 활용했다. 정보 수집을 위해 국내외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들과도 가깝게 지냈고, 정치가들도 국가 재정에 도움을 줄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진 로스차t일드 가문과 가깝게 지냈다. 정치인들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특별한 유대 관계는 종종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워털루 전쟁을 이용해 큰 돈을 번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 런던에 기반을 잡고 있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 모두가 프랑스 나폴레옹의 승리를 점칠 때 의외의 결정을 내린다. 프러시아(독일)에 전쟁자금 1억파운드를 빌려준 것이다. 그리고 네이선은 남보다 앞선 정보 전달 수단을 이용해 나폴레옹의 패배 소식을 가장 먼저 입수했다.
당시 영국 금융 시장에서는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이 프랑스에 질 것으로 생각한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를 내다 팔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국채를 헐값에 사들이고 영국이 승리했다는 정보를 뒤늦게 흘렸다. 이후 영국 채권 가격이 급등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로스차일드가는 영국이 수에즈운하 지분을 매입하는 데도 관여했다. 1875년 로스차일드가는 영국 디즈레일리 정부에 400만파운드를 빌려줬고, 그 덕분에 영국이 수에즈운하 지분을 살 수 있었다. 당시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 역시 유대인으로,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로스차일드가 영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가 뭐냐고 물으니, 디즈레일리가 ‘대영제국’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로스차일드가를 세계적인 명문가 반열에 올려 놓은 사람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다.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 수완이 좋아 골동품 거래와 동전 장사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가게에 내건 휘장이 ‘붉은 방패(독일식 발음 로트칠트)’였고, 그것이 로스차일드란 이름의 기원이 됐다. 사업 감각이 남달랐던 마이어 암셸은 이후 은행업에 뛰어 들었고,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제후 빌헬름 공작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큰 부를 쌓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 마이어의 다섯 아들이 유럽 각국으로 이주하면서부터다. 큰 아들 암셸은 프랑크푸르트에 남았지만, 둘째 아들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셋째 네이선은 영국 런던으로, 넷째 칼은 이탈리아 나폴리로, 막내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다섯 아들은 유럽 각국에서 금융사업을 하면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재산을 불려 나갔다.
로스차일드가는 19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승승장구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쓴 <로스차일드(The house of Rothschild)>에 따르면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간 로스차일드 은행은 세계 최대 은행이었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전성기 때 누렸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로스차일드가에도 위기는 있었다. 크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반복되는 전쟁 속에서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세력은 위축된다. 로스차일드가 존재감을 다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 캐나다에서 1300만헥타르에 달하는 토지 개발권을 따내 목재, 전력, 광물 자원을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리조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물론 가문의 주력 사업인 금융투자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가족 구성원 간 흔들림없는 단합”을 비결로 꼽았다. 그는 막대한 부를 지키려면 가족의 결속이 깨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이어 암셸이 유언으로 남긴 ‘화합(Concordia)’, ‘단결(Integritas)’, ‘근면(Industria)’ 은 현재 로스차일드의 가훈이기도 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상징하는 5개의 화살은 마이어 암셸의 다섯 아들, 5형제의 결속을 의미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문 내 결혼, 재산의 비밀 관리, 장남의 가문 승계’ 등을 통해 외부인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친 결혼을 선호했다. 가문의 재산을 영구히 지키기 위한 방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