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 창고에 보관된 오크통 안에서 사토 무통 로칠드 와인이 숙성되는 모습.
와이너리 창고에 보관된 오크통 안에서 사토 무통 로칠드 와인이 숙성되는 모습.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는 와인업계 벤치마킹 ‘0순위’ 와이너리다. 무통이 절대 양보하지 않는 핵심 가치가 있다면 바로 ‘품질’ 이다. 무통은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 팔기 위해 기존 와이너리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방법을 도입했고, 성공을 거뒀다.


와인 샤토 병입 최초 도입

필립 드 로칠드(1902~88)는 샤토 무통 로칠드의 명성을 크게 드높인 주역이다. 그는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매입한 로스차일드(로칠드는 로스차일드의 프랑스식 발음)가(家)의 나다니엘 드 로칠드의 증손자다.

나다니엘 남작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가 차례로 와이너리를 상속 받았지만, 와인 생산에 관심이 없었다. 무통 로칠드의 명성도 지금 같지 않았다.

필립 남작은 1922년부터 무통 로칠드를 경영했다. 필립 남작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보르도로 피난을 가면서 샤토 무통 로칠드를 처음 방문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냈던 필립 남작은 보르도의 고요함과 농부들의 친절함에 큰 매력을 느꼈고, 아버지에게 무통의 관리를 맡겠다고 요청한다. 당시 무통은 장부상 손실이 계속됐고, 주인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틈을 타 관리인이 이익을 착복하고 있었다.

필립 남작은 보르도에 내려와 2년 동안 와인 업계를 면밀히 살핀 끝에 문제점을 발견했다. 당시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을 양조한 다음 오크통째로 중간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생산은 와이너리가 하지만, 와인의 숙성과 병입은 중간 상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요점은 와인이 와이너리를 떠난 후 어떻게 관리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필립 남작은 포도 경작과 양조, 숙성, 병입까지 모든 과정을 생산자가 담당하지 않으면 품질을 보장할 수 없다고 보고, 와인업계 최초로 ‘샤토 병입(오크통 속의 와인을 와이너리에서 병에 담는 공정)’을 하겠다고 밝힌다.

필립의 주장은 프랑스 와인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와인 숙성과 병입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가져가던 중간 상인들이 크게 분노했다. 대다수 와인 생산자들도 동조하지 않았다. 중간 상인들이 와인을 매입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와인을 직접 숙성하고 병입까지 하려면 많은 투자가 필요한 것도 이유였다.

필립 남작은 굽히지 않았다.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 그라브 지역의 1등급 4개 샤토와 소테른의 특 1등급 샤토인 샤토 디켐을 설득해 ‘6개 샤토 동맹’을 맺고, ‘와인을 생산자가 직접 샤토에서 병입한다’는 선언했다. 당시에는 2등급 밭이었던 무통이, 그것도 22살의 젊은이가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필립 남작은 “내 와인은 내 병에 나의 라벨을 붙여 나의 샤토를 떠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와인의 품질을 보증한다는 뜻이었다.

와인업계에서는 무통의 파격적인 실험이 프랑스 와인의 지위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 와인 체계는 1855년 만들어진 후, 단 한 번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샤토 병입을 통해 와인의 품질이 일정하게 관리되면서, 프랑스 와인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이어졌고 등급 체계도 근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단 한 번의 변화는 2급이었던 무통이 지난 1973년 1등급으로 승급한 것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위치한 샤토 무통 로칠드의 포도밭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위치한 샤토 무통 로칠드의 포도밭


불황기 맞춤형 상품‘무통 카데’

무통 로칠드는 1930년 ‘무통의 막내’라는 뜻의 브랜드 와인 ‘무통 카데’를 업계 최초로 내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무통 카데’의 탄생 배경에는 품질을 포기하지 못하는 로칠드의 고집이 있다. 1930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날씨가 매우 나빴고, 수확한 포도 품질이 좋지 않았다. 당시 와이너리의 주인이었던 필립 남작은 와인을 맛본 후 샤토 무통 로칠드의 이름을 달고 출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세컨드 와인(최고급 와인인 퍼스트 와인보다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출시하기로 결정한다.

필립 남작은 다른 와이너리들이 세컨드 와인을 출시했을 때 소비자들이 퍼스트 와인과 세컨드 와인을 혼동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샤토 무통 로칠드와 세컨드 와인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해 ‘무통 카데’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는 와인 생산지 혹은 와이너리의 이름이 곧 와인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대였다. 한마디로 ‘브랜드 와인’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와인업계에서는 무통 카데가 샤토 무통 로칠드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상과 다르게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통 카데는 출시되자마자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았다. 1930년 포도 품질은 최악이었지만, 무통 카데는 샤토 무통 로칠드에 사용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기에 가격 대비 품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립 남작은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해,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을 공략했고 성공을 거뒀다.

무통 카데는 한 번의 시도로 끝나지 않았다. 보르도 지역의 작황은 이후에도 3년 연속 좋지 않았다. 무통 카데는 계속 생산됐다. 덕분에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 무통 카데는 에브리데이 와인으로 자리 잡았다. 필립 남작은 무통 카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무통 카데’는 ‘무통 로칠드’에서 생산한 와인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70년대 샤토 무통 로칠드의 1등급 승격을 반대하던 샤토 오 브리옹이 무통 로칠드가 무통 카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승낙하겠다고 제의한 것은 무통 카데의 존재가 기존 와이너리에게 위협적이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외 파트너와 윈윈 추구

샤토 무통 로칠드는 와인의 국제화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해외 곳곳에서 실력 있는 파트너를 찾아내, 와인을 만드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유했다. 그 결과 미국, 칠레 등 신대륙에서 훌륭한 와인들이 탄생했다.

1979년 필립 남작이 로버트 몬다비와 합작으로 만든 와인 ‘오퍼스 원(Opus One)’이 대표적이다. 로버트 몬다비는 싸구려 와인으로 인식됐던 캘리포니아 와인의 위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오퍼스 원’ 와인 라벨에는 몬다비와 필립 남작 두 사람의 옆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품 하나’란 이름대로 두 거물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와인이다.

칠레의 와인 명가 콘차이토로(Vona Concha y Toro S.A)와 무통 로칠드가 함께 만든 와인 알마비바(Almaviva)도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양가는 세계적인 수준의 프리미엄 와인 생산을 목표로 칠레 중앙 마이포 밸리 고지대에 위치한 푸엔테 알코 지역에 알마비바를 설립하고 와인을 생산했다. 알마비바는 프랑스 스타일의 양조법으로 만들어진 완성도 높은 신대륙 와인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칠레, 호주 등 신대륙 와인은 가격 대비 뛰어난 품질을 내세워 와인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신대륙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하우를 외부에 전수하는 이유에 대해 지난 2014년 타계한 무통 로칠드의 전(前) 오너 필리핀(Philippine) 드 로칠드 여사는 “와인 대신 맥주나 위스키를 마셔 와인 시장이 작아지는 게 더 큰 문제”라며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