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출신들이 퇴임 후 중견 그룹사나 외국계 기업의 한국 현지법인 사장 혹은 임원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추세가 상당히 줄었다. 새로운 회사의 오너나 외국계 회사의 본사 측이 기대한 만큼 이들이 역량을 보여 주지 못하고 적응에 실패해 1~2년 안에 떠난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 중견그룹 회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의 풍부한 경험과 역량을 통해 회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리라 기대했는데 입사 후 얼마 안 돼서부터 대외 업무를 핑계로 밖으로만 돌다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앞으로 다시는 대기업 출신 인력을 채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중견기업으로 옮긴 대기업 임원 출신 A씨가 “이 회사에는 일을 시킬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하겠다”, “회장님이 생각을 잘못하시는 것 같은데 바꾸려 하질 않는다” 등의 불평만 늘어놓다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봤다.

이런 상황은 외국계 기업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미국계 식품가공회사의 대기업 출신 사장 B씨는 취임 후 “일할 사람이 없다”며 영어가 안 되는 같은 회사 출신 후배를 영업담당 임원으로 채용하고, 6년 동안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혼자서만 하는 등 완전히 폐쇄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다 결국 자리를 내놓았다. 독일계 산업재 생산회사의 대기업 출신 사장 C씨는 “본사 인사제도와 정책이 이전 대기업보다 낙후됐다”며, 취임 후 3년 동안 본사를 설득해 제도와 정책을 바꾸겠다고 마찰을 빚었다. 결국 C씨는 회사를 나왔다. 이 회사는 70년 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해 갖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인사제도와 정책을 확립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독일 본사의 입장이 어떠했을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前 직장 고유문화 도취가 정착 실패 주원인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첫째는 실무역량의 감소 또는 부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하면 대부분 실무에서 거의 손을 떼고 대(對)고객, 대(對)관, 그 외 이해관계자와의 인적교류 업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원활한 업무 프로세스와 성과를 위해 회사 내 이해관계자, 즉 사내 고객과의 인적교류에도 힘쓴다. 그러나 임원으로서 이런 업무를 오래하면 할수록 실무 능력은 사라진다. 이런 이유로 업무여건이 대기업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중견기업이나 실무역량이 필수인 외국계 기업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은 기대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둘째는 이전 직장의 고유문화에 도취해 새로운 문화에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손에 꼽는 국내 그룹들은 각기 다른 고유문화가 있다. 이들 그룹계열 대기업에서 임원이 된다는 것은 고유문화에 완전히 흡수돼 철저한 ‘○○(회사명)맨’이 됨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부분 공채로 입사해 수십 년 동안 한 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해 온 사람들이다. 경쟁사 간 인력 이동이 일반적인 외국과 달리 국내에선 같은 업종 내에서 타 회사로 이직하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질 만큼 부정적이다. 다른 회사에서의 경험이 없고 한 회사의 문화에만 푹 빠지다보니 ○○맨은 충성도는 높을 수 있어도 새로운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어렵게 된다.

새 회사에서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해법은 있다. 대기업에서 임원생활을 하더라도 항상 실무 감각을 떨어뜨리지 않게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120세 시대라고 할 정도로 평균 수명이 늘었다. 더불어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기간도 늘었기 때문에 대기업 임원으로 있다가 언제든지 중견기업으로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필자가 아는 한 외국계기업 임원출신 중견기업의 사장은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며 지금도 영문 계약서 검토, 자료 제작을 본인이 한다. 필요한 보고서나 PT(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본인이 직접 만드는 외국계 기업에서의 업무 경험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역량을 계속 키워나가기 위해 폭넓은 관심사를 지녀야 한다. 한 기업에만 묻혀 지내다보면 좁은 시야를 갖게 되기 쉬운데 책도 많이 읽고 새로운 문화, 기기 등을 계속 접해야 한다.

대양에서 오랫동안 큰 배를 운행한 선장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내륙 수로의 작은 배를 몰라고 한다면 쉽게 몰 수 있을까. ‘나는 큰 배를 운행해봤으니까 작은 배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라고 안심한다면 큰 오산이다. 큰 배에서는 모든 게 자동화돼있고 잘 훈련된 경험 많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지만, 작은 배에서는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많고 혼자서 일당백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로는 더 좁고 대양보다 암초 등 장애물도 많을 것이다.

이때는 ‘각오’가 필수다. 예전 직장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작은 배에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다. 틈틈이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아보고 도전의식을 장착해야 한다. 이런 준비를 마친다면, 새 보금자리에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암롭(Amrop)
암롭은 197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설립된 글로벌 임원급 전문 헤드헌팅사로 현재 57개국에 83개 사무소를 두고 있다. 한국 시장에 1994년 진출했으며‘Your Success is Our Business’를 모토로 20여년간 고객사의 비즈니스 및 후보자 커리어 관리 성공을 위한 헤드헌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90% 이상의 성공률을 기록하며 업계 7위로 자리매김했다.


▒ 이학범
서강대 무역학과, 씨티은행 부장, 시큐리티퍼시픽내셔널은행 부지점장, 노먼브로드벤트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암롭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