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 공동 창업자인 제리양, 디즈니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폴 프레슬러, 드롭박스 1호 투자자 페자먼 노자드. 이런 쟁쟁한 글로벌 투자자들이 주목한 한국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있다. 바로 미미박스(대표 하형석)다.

지난해 1월 이들 투자자들은 미미박스에 2950만달러(약 330억원)를 투자했다. 국내 스타트업이 받은 투자 중 가장 글로벌한 투자였다. 당시 국내 업계는 충격을 받았다. 창업 초기 국내 투자사들로부터 모두 투자를 거절당했을 만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의 업체였기 때문이다.

미미박스는 2014년 중국 상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지사를 설립했으며 지난해 말부터 동남아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특히 중국에선 진출 1년 만에 2배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설립 당시 4명이었던 직원은 300여명으로 늘어났다. 2012년 1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2014년 1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미미박스의 국내 가입자 수는 200만명이 넘는다. 미미박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성공요인1 | 시장 상황에 맞게 빠르게 변신

2011년 12월 창업한 미미박스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재빠르게 변신했기 때문이다. 미미박스의 초기 성장은 월정액(1만6500원)을 받고 소비자에게 맞춤 화장품을 보내주는 서브스크립션(Subscription, 구독)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매달 잡지를 보내듯이 전문 상품기획자의 깐깐한 검증을 거친 화장품의 정품과 샘플을 ‘뷰티박스’에 담아 보내는 형태였다. 화장품을 협찬으로 받는 대가로 고객의 피드백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리포트를 제공했다. 이 서비스는 2014년 말 종료됐다.

2014년 9월 미미박스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협업해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만든 것이다. 첫 제품은 출시 40분 만에 2만개가 완판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고객 욕구를 직접 파악했고, 제작과 판매에도 직접 참여해 불필요한 가격거품을 뺀 것이 주효했다. 이후 미미박스는 자체 브랜드 ‘미미 뷰티’를 론칭하며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최근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바로 O2O시장에 뛰어든 것. 기존의 화장품 회사들은 방문 판매와 오프라인 스토어, 백화점 등을 기반으로 유통하다가 온라인과 모바일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미미박스는 사업 초기 시행했던 서브스크립션과 온라인 플랫폼으로 고객을 모은 뒤 드럭스토어 ‘왓슨스’ 입점을 시작으로 롯데백화점 팝업스토어, 롯데 및 신라 온라인 면세점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난해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본점에서 열린 팝업스토어 때 백화점 측은 당초 14일이었던 운영 기간을 20일로 늘렸다. 백화점 측은 국내 소비자뿐 아니라 유커(遊客)까지 몰리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온라인 플랫폼을 오프라인 매장으로 구현해내는 새로운 사업 모델이 적중한 것이다.

현재는 한국의 화장품과 뷰티 기기 등을 해외에 소개하는 플랫폼 역할과 화장품 제조 판매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지금은 한국 화장품을 해외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플랫폼 역할의 비중이 커졌다”고 말했다.

김영배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미미박스는 비즈니스 모델이 성과를 내는 시점부터 다음 단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했다”며 “비즈니스 모델이 경쟁력을 상실하기 전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뤘다”고 분석했다.


미미박스는 제리양 야후 공동창업자 등으로부터 약 33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제리양(왼쪽)이 201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하형석 대표를 만나고 있다.
미미박스는 제리양 야후 공동창업자 등으로부터 약 33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제리양(왼쪽)이 201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하형석 대표를 만나고 있다.

성공요인2 | 고객 반응 직접 조사해 제품에 반영

미미박스는 끊임없이 비즈니스 모델을 변경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경쟁해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고객의 신뢰다.

미미박스의 인기 비결은 사용자들이 직접 사용해보고 올린 생생한 리뷰에 있다. 브랜드명, 가격, 용량, 장단점은 물론 어떤 이들에게 맞는지 꼼꼼한 정보가 들어 있다. 먼저 사용해본 소비자들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에 제품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미미박스에서는 10만개에 가까운 제품이 거래되고 있으며 실제로 제품을 구매한 고객의 리뷰 수가 62만개에 가깝다. 다른 온라인 쇼핑몰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은 리뷰 수는 온라인이나 모바일 구매 시 고객에게 믿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고객의 리뷰는 화장품 제조사에 전달돼 제품 개선에 활용되기도 한다. 화장품 기업들은 신제품을 내놓은 뒤 미미박스를 통해 시장 반응을 살피는 것이 이젠 일상이 됐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리뷰는 고객의 신뢰도를 높이고, 더 좋은 제품을 선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말했다.


성공요인3 | 창업 때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 목표

미미박스는 창업 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뒀다. 한국 화장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국내 우수한 중소기업 제품을 해외에 알리는 통로가 되고 싶었다. 설립 초기 미국에서 인큐베이터를 찾았고, 중국은 ‘K-뷰티’ 바람을 활용한 전략을 펼쳤다.

특히 중국에서는 현지 트렌드를 반영한 공동 연구 및 제품 개발을 통해 중국 소비자들의 욕구를 반영했다. 그동안 한국 화장품에 대한 중국 소비자들의 욕구는 강했지만 그에 맞는 공급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외 진출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2013년 7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나는 글로벌 벤처다’에서 미미박스가 대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와이콤비네이터(Y-combinator) 관계자가 “미미박스의 사업 모델이면 미국에서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며 하 대표의 용기를 북돋웠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와이콤비네이터가 투자한 기업은 560여개에 달한다.

2014년 1월 하 대표는 글로벌 벤처 대상 상금 1000만원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와이콤비네이터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와이콤비네이터가 요구하는 성장 목표를 달성하고 사업 계획을 만족시키려 주 7일을 일해야 했다. 밤을 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의 성실성에 와이콤비네이터의 마음이 움직였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400여 투자사 앞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발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이 발표는 이후 미미박스가 330억원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단초가 됐다.


끈질긴 도전정신이 만든 성과

다른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미미박스의 출발은 초라했다. 창업자금은 3500만원이 전부였다. 책상 4개 들어가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창업 멤버 4명은 아침 7시30분부터 밤 12시 넘어까지 일하는 강행군을 했다.

거래처인 화장품 회사 담당자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100명에게 전화를 하면 2, 3명 정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제안서 하나 들고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대부분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200군데를 찾아가면 서너 곳은 계약할 수 있었다. 유명 브랜드는 서너 달에 걸친 설득 끝에 미미박스에 합류하기도 했다.

막상 시장에 선보인 미미박스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놀라웠다. 2012년 2월 서비스 시작 후 1개월 만에 월 1억원, 3개월 만에 월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형석 미미박스 대표
군고구마 장사 때 시즌 이용권 개념 도입

하형석 대표
하형석 대표

하형석 대표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의 남다른 사업 수완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한 토막. 하 대표는 2003년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하지만 그냥 군고구마를 판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손님이 1만5000원짜리 시즌 자유 이용권을 사면 하루에 2개씩 겨울 내내 군고구마를 먹을 수 있게 했다. 전화로 주문한 고객에겐 집으로 배달도 했다.

직장인 퇴근 시간인 저녁 6시부터 8시 30분까지만 집중적으로 팔았다. 군고구마 장사는‘대박’이었다. 한 달 매출액은 800만원에 달했다. 그해 겨울 4개월 동안 3000만원 넘게 벌었다. 장사가 잘되자 그는 친구 두 명에게 반포역 부근에 군고구마‘2호점’을 내도록 했다.

2002년 경희대 환경공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2007년 미국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에 들어가 패션을 전공했다. 그가 패션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 복무(2004~2006년) 중 아프가니스탄에서 6개월 동안 통역병 생활을 한 덕분이다. 제대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를 찾아 들른 뉴욕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활기차고 열정이 넘치는 뉴욕에서 패션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플랫폼을 활용한 제품 판매 방식을 배운 것도 그때였다. 첫 학기 등록금은 누나의 결혼자금으로 해결했지만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그는 이베이에서 하자가 있는 물건을 파는‘샘플세일’을 이용했다. 세일 때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해 다시 이베이에서 팔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매달 300만~400만원 정도를 벌었다.

이후 그는 뉴욕에 있는 톰포드 인터내셔널을 거쳤으며 의류회사인 제너럴아이디어에서 해외 사업을 경험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티켓몬스터 B2B 패션뷰티 팀장으로 일한 후 2011년 12월 미미박스를 창업했다. 단지 친구들과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