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닝 시즌이 시작됐다. 어닝 시즌에 발표되는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의 핵심은 해당 사업연도 혹은 회계연도의 사업을 분석한 ‘당기’의 재무적 성과다. 동시에 이 재무성과를 기준으로 주당순이익(EPS)이나 주가수익비율(PER)이 계산돼 시장에 전해진다.
재무성과를 중심으로 한 어닝 시즌의 이런 전형적인 풍경은 그러나 곧 달라질지 모른다. 조만간 한국에 불어닥칠 변화의 진원지는 유럽이다. 어닝 시즌의 핵심인 성과와 관련해 유럽 기업들이 기존 재무성과 외에 추가로 비재무성과까지 발표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내 종업원 500인 이상 기업은 빠르면 2017년부터 비재무성과를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비재무성과는 한마디로 ‘ESG’로 표현되는 환경, 사회, 거버넌스(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측면의 실적을 말한다.
대 유럽 수출 기업에 악영향
비재무적성과 및 정보의 공시 의무화는 2014년에 결정됐다. ESG 공시 의무화 법안은 기업 공시 관행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유럽 재계의 강력한 반발을 뚫고 통과된 이 법안은 회계에 관한 기존 법률을 일부 개정한 것이다. 종업원 500인 이상 기업에 ESG를 뼈대로 한 비재무 및 다양성에 관한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했다.
대상 기업은 종업원 수가 500인이 넘는 상장 및 비상장 기업을 망라한다. 은행, 보험사와 같은 금융회사도 포함한다. 비재무정보 공시 의무는 EU에 가입한 모든 회원국의 기업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 비재무정보 공개는 기업의 연차보고서를 활용하도록 했으며 환경, 사회, 종업원에 관한 내용은 물론 인권, 반부패, 뇌물 등에 관해서도 기술하도록 했다. 연차보고서에는 비재무성과와 관련해 기업이 도입한 정책과 비재무적 위험과 이 위험에 기업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적시하도록 했다. 다양성과 관련해서는 연령, 성, 지역, 교육 및 직업적 배경 등을 포괄하도록 규정했다.
보고 형식과 관련해 EU는 통합보고(IR·Integrated Reporting)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기업의 통합보고는 전통적인 재무정보 중심의 보고에서 벗어나 장기적 가치창출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재무, 비재무적 요인을 통합해 보고하는 방식이다. EU가 통합보고를 강제하진 않았지만 비용과 편리성 등을 감안할 때 사실상 통합보고가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EU의 어닝 시즌에 이제 순이익 외에도 해당 사업연도에 온실가스를 얼마나 저감했는지, 물 사용량을 얼마나 줄이고 폐기물을 얼마나 배출했는지 등의 비재무정보가 쏟아져 나오게 됐다는 뜻이다.
EU는 보고의 편의를 고려해 그룹에 소속된 기업에 대해서는 개별 기업이 따로 비재무정보를 공시하지 않고 그룹 차원에서 전체적으로 공시하는 것을 권장했다. 변경된 공시제도는 2017 회계연도부터 적용된다. 내년부터 유럽 기업의 공시제도가 전면 개편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후년 어닝 시즌은 오랫동안 이어진 모습과는 다른 풍경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더 긴박한 문제는 EU의 CSR 강화가 무역장벽으로 작동하게 될 가능성이다. 무역절벽 등 여러 이유로 세계경제는 침체국면이고 국내 경기도 좀체 살아나지 못하는 가운데 목전에 다가온 유럽의 비재무정보 공시 의무화는 어떤 식으로든 대 유럽 수출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업홍보물 수준 비재무정보 공시 관행 바꿔야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대부분 비재무정보를 공시하고 있다. 주요 대기업들이 매년 발간하는 ‘지속가능보고서’가 그것이다. 작성 기준으로는 비재무정보 또는 지속가능보고 작성의 국제표준으로 간주되는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를 쓴다. ‘지속가능’에 심한 편중을 보이는 것 말고는 미국 기업들과 비슷한 양상이다. 유럽 기업들은 작성 기준과 보고서 명칭이 우리나라나 미국보다 훨씬 다양한 편이다. 예컨대 ‘지속가능’보다는 ‘사회책임’이 더 선호돼 ‘기업사회책임보고서’ 등의 이름으로 비재무정보가 공시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이 내는 지속가능보고서는 국제 관행에 부합하는 수준의 비재무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꼭 필요한 정보를 누락시키는가 하면 자사에 불리한 정보는 아예 싣지 않는 사례가 많다. 외감법에 근거한 감사보고서와 달리 한국 기업들의 사회보고서는 정보를 조금 더 넣은 기업홍보물에 머문다.
앞서 EU의 새로운 회계지침 기준으로 보면 한국 기업들은 아예 비재무정보를 공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의 아킬레스건인 소유구조를 어떻게 해외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지난한 일이다. 특히 오너 리스크가 상존하는 재벌기업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이 땅콩회황을 사회보고에 어떻게 기술할지, 효성이 부자 간의 다툼을 어떻게 무난하게 표현할지를 생각하면, 기존 재벌기업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전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심각한 오너 리스크가 없다 해도 유럽 수출 한국 기업은 현실적으로 유럽 기업에 준하는 비재무정보 공시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무노조 방침, 산업재해, 직업병 대책에 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사실상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말고 해명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삼성전자로서는 관련된 비재무정보를 고의로 누락할 개연성이 크다.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자동차 역시 비재무정보 공시가 곤란할 것으로 보인다.
공기업은 재벌기업에 비해 나은 형편이지만 안전하지는 않다. 정부로부터 부당한 간섭에 시달리는 한국의 공기업 또한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를 안고 있으며 비정규직 문제와 부패 문제에 노출돼 있다.
비재무 영역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는 ‘성과’를 내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들에 남은 선택은 사회보고의 회피, 사회보고의 분식, 정상적인 사회보고를 통한 비재무적 리스크의 공개가 있다. 어느 것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EU의 비재무정보 공시 의무화의 도래에 대비해 CSR마케팅이 아닌 진정성 있는 CSR과 적절한 소통만이 한국 기업이 유럽 시장에서 장기 생존을 보장받는 첫걸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EU와 유사한 입법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비재무정보 공시는 물론 비재무성과 개선에 기업들이 관심을 기울이며 적절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때다.
▒ 안치용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서강대 경제학 석사, 경희대 경영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 2.1지속가능연구소장 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