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차(茶)의 역사는 중국 문명의 시작과 동일선상에 있다. 차는 중국의 남쪽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돼 약(藥)으로 출발해 건강음료로 정착했다. 중국 전역에 차가 알려지기 전에는 북방은 술 문화가 주류였다. 남방의 차 문화가 북상해 중국 전역에 차를 공급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다.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 때에도 소규모의 수로공사는 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긴 1794㎞의 경항대운하를 만든 것은 수(隋)나라를 세운 문제(文帝·541~604)와 수나라를 망하게 한 양제(煬帝·569~618)다.
대운하 건설 시작한 문제
수나라는 동한(東漢)이라고도 부르는 후한(後漢·25~220년) 말기에 일어난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계기로 시작된 대륙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를 400여년 만에 종식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국가다. 수나라를 창건한 문제는 양견(楊堅)이라는 한(漢)족의 성을 딴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선비족(鮮卑族) 출신으로 원래의 성씨는 보륙여(普六茹)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문제의 부인 독고가라(獨孤伽羅)가 선비족 최고실력자 독고신(獨孤信)의 넷째 딸임을 부인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대륙의 혼란 상태에 마침표를 찍은 명군으로 평가받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아내를 무서워한 공처가이기도 하다. 독고황후의 기세에 눌려 황제의 당연한 특권인 후궁도 마음대로 취하지 못했으며 아들 다섯 모두 독고황후가 출산했다. 중국 역사에 전례가 없는 조신한 황제인 문제가 편애하는 후궁은 독고황후의 손에 죽어나갔다. 이에 염증을 느낀 문제는 황궁을 빠져나가 절로 들어가 속세를 벗어나려 했다.
이 무렵 문제는 자신이 비참하게 죽는 악몽을 꿨다. 두통과 악몽에 시달리는 문제에게 스님이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 스님의 말대로 차를 구해 달여 마신 문제는 두통이 사라지고 악몽에서도 해방됐다. 그날 이후 문제는 차를 주변에 두고 수시로 음용했다. 문제를 따라 신하들도 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차를 찾았다. 좋은 차를 문제에게 바쳐 눈에 들면 바로 벼슬길이 열렸다. 차를 경쟁하듯 구하는 열풍이 불면서 좋은 차가 생산되는 중국의 남쪽지방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길이 험하고 도적 떼가 수시로 출몰하는 육로보다 안전한 수로가 필요했다. 문제는 중국 강남의 풍부한 물자와 차를 빨리 운반할 목적으로 대운하공사를 시작했다.
584년 문제의 명을 받은 우문개(宇文愷)는 장안(長安) 남동쪽에 건설한 수나라의 수도 대흥성(大興城)에서 동관(潼關)까지 120㎞에 이르는 광통거(廣通渠)를 건설했다. 587년 우문개는 춘추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제(齊)나라 공격을 위해 만든 한구( 溝)를 보수해 재개통했다. 거듭되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들어가는 세금과 부역 동원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면서 문제는 대운하 건설을 일단 중지했다. 중국 최초로 과거제도와 균전제를 실시해 기존 상류층을 견제하며 민심을 다스렸다.
중국을 통일하고 나라도 안정시킨 문제는 598년 6월 다섯째 아들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했다. 문제는 고구려 원정 실패를 서곡으로 참담한 비극으로 접어든다. 600년 문제는 독고황후의 무리한 요구에 승복해 장남인 양용(楊勇)을 태자에서 폐하고 둘째 아들 양광(楊廣)을 태자로 책봉했다. 602년 독고황후가 서거하자 문제는 국정철학인 유교사상에 따라 장남을 다시 태자로 복권시키려 했지만 이미 양광의 수족이 된 신하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04년 문제는 양광의 심복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양용도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교살당했다.

운하 타고 북상한 차
살부살형(殺父殺兄)의 패륜을 저지르며 604년 8월 21일 수나라 2대 황제에 오른 양제는 618년 4월 11일 죽임을 당할 때까지 15년에 걸친 혹독한 정치로 중국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된다.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양제가 첫 번째 한 일은 아버지의 애첩 선화부인(宣華夫人)을 범하고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문제가 백성의 어려움을 감안해 중단한 경항대운하공사를 양제는 바로 재개했다. 대운하 건설은 부녀자까지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며 4단계로 이뤄졌다. 양제는 만리장성을 능가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6년 만에 완공시켰다.
북경을 기점으로 천진(天津),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苏省)과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까지 이어주는 세계에서 가장 긴 경항대운하는 황하(黄河)와 장강(長江) 등 중국 5대 수계를 연결하며 강남 일대의 풍부한 물산들을 대량 수송하는 동시에 강남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강남의 특산물로 황실과 부유층에게 귀한 대접을 받던 차도 운하를 타고 북상했다. 차와 함께 강남의 차문화와 차도구들도 중국 전역에 확산됐다. 중국인과 차를 생활과 문화에서 불가분의 관계로 만든 계기가 수나라가 만든 경항대운하다.
대운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희생당한 사실을 무시한 양제는 아버지가 실패한 고구려 침공을 세 번이나 시도하며 농민저항과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618년 양제는 반란군도 아닌 부하장수에게 목이 졸려 죽으며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통일국가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과 무리한 대운하 공사로 38년 만에 사라지고 당(唐)나라에 중원을 내준다. 당나라는 경항대운하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 차 문화를 꽃피운다.
▒ 서영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한국 영화 감독 협회 이사, 미국 시나리오 작가 조합 정회원, 중국 사천성 홍보대사, 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