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茶)는 물을 만났다. 수(隋)나라가 건설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비롯한 수로를 따라 이동하며 당(唐)나라 때 차는 중국 남쪽의 지역문화에서 대륙 전체의 문화로 확대된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폐해와 거듭된 고구려 원정 실패로 민심이 떠난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수나라를 창건한 문제(文帝)와 동서지간이다. 이들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천연요새 무천진(武川鎭) 분지를 중심으로 발호한 강력한 군사집단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의 맹주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관롱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나라 최대 정치세력인 관롱집단을 무력화시켜 당나라의 맥을 끊고 주(周)나라를 세운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다.
차로 기력 회복한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공자(孔子)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고대의 주(周)나라를 표방한 대주(大周)를 창업해 690년 9월 9일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로 즉위했다. 정식 시호는 측천무후여황제(則天武后女皇帝)지만 말년에 당나라의 황후로 기록되기를 원해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라는 시호도 갖고 있다. 측천무후는 주나라 황제로 16년간 통치했지만 당나라 고종의 황후(皇后) 시절 29년과 황태후(皇太后) 6년을 더하면 50여년간 실질적으로 장기집권했다. 실권을 잃고 노쇠한 이후에도 복원된 당나라 중종의 태상황(太上皇)이 돼 죽을 때까지 위세를 떨쳤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개국공신으로 신흥귀족이 된 무사확(武士)이 관롱집단의 세력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해 낳은 둘째딸이다.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武照)인데 주나라 황제로 즉위하며 자신의 이름을 조()로 개명했다. 637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14세의 어린 나이였던 무조를 후궁으로 받아들여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12년 동안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으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낳지 못한 무미는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태종의 극락왕생을 빌며 비구니로 평생을 보내게 됐다.
무미를 비구니에서 황실로 다시 복귀시킨 사람은 당 태종에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이었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병석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아름답고 어린 후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태종의 기일에 감업사로 행차한 고종에게 차를 대접하러 나타난 무미는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다. 고종의 감업사 나들이가 잦아지는 사연을 알게 된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는 화를 내기는커녕 황실법도를 무시하고 무미를 환속시켜 다시 황궁으로 들이는 데 적극 나섰다. 황후 왕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숙비(蕭淑妃)를 견제할 사람이 필요했다.
무미는 황제의 사랑과 황후의 보호 속에 정이품 소의(昭儀)로 황실에 재등장했다. 황제의 여인 121명 중에서 여섯번째 서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무미는 황후의 힘을 빌려 소숙비를 몰아내고 이어서 황후도 폐서인시킨 후 잔인한 죽음을 맞게 했다. 관롱집단을 필두로 공신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무미는 고종의 황후로 654년 10월 13일 등극했다. 측천무후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683년 12월 27일 고종이 서거할 때까지 전권을 휘두른 측천무후는 황태후로서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전횡을 일삼았지만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권력을 위해서 친아들을 죽일 정도로 무자비했던 측천무후는 황제인 아들도 믿지 못해 자신이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궤(四軌)라는 투서함을 활용해 밀고정치를 펼쳐 관롱집단을 비롯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공포정치로 중신들도 떨었지만 측천무후도 늘 깨어있어야 했다.
심리적 압박과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측천무후를 구한 것은 차였다. 정신이 혼미해져 병석에 누운 측천무후는 황실어의가 처방한 갖은 약재를 써봤지만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때마침 황실공차로 올라온 신양모첨(信陽毛尖)을 마신 측천무후는 머리가 맑아지며 병석에서 일어났다. 기력을 회복한 측천무후는 신양모첨의 생산지인 차운산(車雲山) 일대를 황가다원(皇家茶園)으로 지정하고 감사의 표시로 천불탑(千佛塔)을 세우게 했다.
중국 10대 명차에 올라
신선의 도움으로 차나무 씨앗을 물고 왔다는 화미조(畵眉鳥)의 전설을 품고 있는 신양모첨은 허난(河南)성 남쪽에 위치한 신양(信陽)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중국 녹차다. 신양은 다섯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차운산을 비롯해 산 이름에 구름 운(雲)자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로 구름과 안개가 많아 차 재배에 적합한 곳이다. 신양모첨의 외형은 하얀 솜털로 덮여 바늘 끝 모양을 하고 있으며 녹차 중에서도 피로 회복과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다경(茶經)을 편찬해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육우(陸羽)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동파(蘇東坡)도 신양모첨을 녹차 중 최고라 칭송했다. 측천무후의 병을 고쳐 더욱 유명해진 신양모첨은 당나라 최고의 차로 부상했다.
신양모첨으로 원기를 되찾은 측천무후는 낙양(洛陽)을 신도(神都)로 개명해 주나라의 수도로 정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황제로 등극했다. 측천무후는 적인걸(狄仁杰) 같은 관리를 등용해 내치에 힘써 경제를 부흥시켰다. 말년의 측천무후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공학부(控鶴府)를 설치해 미소년 72명을 모아 동침하며 채양보음(採陽補陰)까지 시도했지만 705년 12월 16일, 82세로 사망한다. 측천무후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지만 측천무후가 총애한 신양모첨은 ‘중국 10대 명차’에 이름을 올리며 오늘까지 중국 녹차의 왕으로 사랑받고 있다.
▒ 서영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 미국 시나리오 작가 조합 정회원, 중국 사천성 홍보대사, 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