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4월 말이면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총회가 열린다. 올해에는 약 4만명이 참석했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됐다. 오마하의 현인(賢人)이라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85)과 오랜 동업자인 찰스 멍거(Charles Munger·92)가 참석해 그해 투자성과를 보고하고 경제와 주식시장 전망에 대해 주주들과 대화한다. 버핏을 교주(?)로 하는 ‘가치투자교(敎)’ 성지순례 모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주주총회 전날 가치투자가 콘퍼런스가 열렸고 필자는 해당 콘퍼런스에서 신영자산운용의 가치투자철학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국경을 넘어 시장의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투자가로서 급격히 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미국 가치투자가들과 투자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어 오마하에 가기 전 뉴욕에 들러 가치투자 회사를 몇 군데 방문하기도 했다.
전 세계서 몰려드는 ‘버핏 신도들’
미국 가치투자가들도 금융위기 이후 5~6년 정도 힘든 시기를 보내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헬스케어∙바이오 주식, 인터넷 쇼핑몰인 아마존,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전통적으로 가치투자가들이 기피하는 종목들이 시장 상승을 주도해 상당히 고전했었다고 한다. 고생 끝에 작년 하반기 이후 가치주가 서서히 수익률을 만회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제상황을 예단하기 힘들어 이마저도 지속적인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수 개월 전 버핏은 미국 투자가들에게 기대수익률을 낮춰야 한다고 경고했다. 배당수익과 주가상승을 합쳐 향후 10년 정도 연 5% 수익률이면 만족스러운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경제 회복이 예상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비관론이 여전히 우세하고 중국과 유럽 경제의 불안정성이 언제라도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시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회사들이 매우 보수적인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로 자산가치를 중심으로 종목을 선정하고 있었고 그중 일부 회사는 금(金)이나 금광 관련 주식을 50%까지 편입하는 모습도 보였다. 37년 중 36년을 플러스 수익을 낸 한 펀드는 37년 내내 자산의 10%를 금에 투자한 것이 매우 주효했다는 얘기도 했다. 금이 안정적인 받침대 역할도 했지만 주가가 폭등했을 때는 시장을 반도 못 따라가 고객들의 불만이 폭주했었다. 그래도 고객의 반을 잃더라도 절대 고객 자산을 잃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켜왔다고 했다.
덕분에 이제는 고객들이 믿고 기다려 준다는 얘기다. 3~4년을 시장 평균보다 수익률이 낮았을 때도 기다려 줄 수 있는 고객이 있어 그렇게 40년을 버텼고 지금은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한 가치투자 회사 중 하나가 됐다. 여기에 80대 중반이 된 두 파트너가 여전히 현역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 회사가 지켜온 투자철학을 무엇보다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밤늦게 도착한 오마하의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다. 중서부 대평원에 위치한 오마하는 봄이 늦게 찾아 온다고 한다. 이튿날 콘퍼런스 내내 찬바람과 검은 구름이 오마하를 덮고 있었다. 글로벌 투자 환경과 잘 어울리는 날씨였다고 해야 할까! 대여섯명의 발표자들이 각자의 경험담과 가치투자의 매력을 주장했다. 하나같이 (가치투자의 창시자) 벤저민 그레이엄과 버핏의 수제자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버핏만큼 유명한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나 보다. 공자님이 3000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청출어람이 없는 것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버핏을 모방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50년 전 버핏이 투자에 성공하기 시작했을 때의 투자전략과 지금 재벌이 된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재정이 탄탄하고 수익이 좋은 기업을 고르지만 지금은 투자 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 일종의 기업인수식 투자가 주종을 이룬다. 게다가 버핏의 후광효과가 있어 좋은 기업들이 제 발로 찾아와 버핏의 지분참여를 부탁하는 형편이니 사실 버핏은 앉아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주주들은 무조건 믿고 기다린다. 버핏이 지난 5년 가까이 헤매고 있어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사실 5년 정도 기다리면 웬만한 주식투자는 만회할 기회가 있다. 시장은 시간이 지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상승을 주도하는 업종이 한 바퀴 돌기 마련이다. 더구나 미국 다우존스가 금융위기 이전보다 40% 가까이 상승했으니 당연히 그 정도 수익이 나오는 것이 상식이다. 여기에 버핏은 세금의 이연 지급을 귀신처럼 잘 활용하는 투자가다. 종종 이연 지급하는 세금은 축복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분석가들은 그가 세금을 늦게 지급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자 수입만 해도 배당 수익 못지않게 짭짤하다고 한다.
美, 80대 펀드매니저도 맹활약
미국의 가치투자가들 역시 묘수는 없다. 한 펀드매니저가 말하듯 재무제표가 우량한 기업을 발굴해 10년 이상의 재무제표를 철저히 검증하고 향후 현금흐름이 꾸준히 좋은지 전망해보고, 화려한 예상치가 아닌 현실 속에 돈을 벌고 있는 기업을 찾는 것이 가치투자의 출발점이다. 또 철학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신입직원을 뽑아 수년간 훈련시켜야 제대로 된 투자철학과 문화가 나온다(한국처럼 돌려막기식 펀드매니저 스카우트로는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은 목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니저들이 같이 오랜 기간을 근무해 성공과 실패를 통해 투자노하우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얘기다. 다만 실천하는 회사와 아닌 회사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금융위기 이후 8년간 펀드 운용의 부침을 보면 거북이와 토끼의 이솝 우화 복사판이다. 한때 트렌드에 휩쓸려 유명세를 타고 돈이 몰렸던 펀드들이 오래 가지 못하고 주저 앉아 버린 이유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거나 확신이 지나쳐 시장에 대한 겸손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100억원 규모의 펀드로 수익신화를 썼던 매니저가 돈이 몰려 자산이 1000억원이 되고 1조원이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성장통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과정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펀드가 실수와 성공을 겪고 또 자산의 급증과 급감을 경험하면서 최소 10년 이상 인고의 세월 속에 담금질 되어야 믿을 수 있는 펀드라고 인정한다. 그게 장기 가치투자의 최소 필요조건이다.
지금 한국은 조선과 해운 업종만이 아니라 사실상 거의 전 업종이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는 말에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 구조조정은 몇년 만에 끝날 일도 아니다. 어쩌면 일본의 복합불황 기간보다 더 긴 혹한기를 거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럴수록 보수적인 투자관을 유지해야 한다. 단기 수익률을 좇을수록 위기를 넘길 원금을 잃을 확률이 높다. 차라리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현금보유가 차선책이 될 수도 있다. 2~3%의 수익에도 만족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거북이 같은 투자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바로 배당에서부터 출발하는 투자 전략이다.
어떤 신기술이 세상을 바꿀지 또 그 기술을 선점해 많은 돈을 벌 회사가 한국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 돈을 벌고 있고 올해, 내년 또 그 후에도 배당을 은행 금리 이상 줄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하고 기다릴 뿐이다. 오마하에 모였던 가치투자가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 이상진
서울대 법학과, 현대중공업, 신영증권, 슈로더증권 최고투자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