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이하 연준)가 논란에 휩싸였다. 대선 후보들은 연준의 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월스트리트와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도 동조하고 나섰다.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월스트리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 배경이다.
호의적인 클린턴도 개혁 주장
5월 13일(현지시각) 민주당의 클린턴 선거운동본부는 워싱턴포스트(WP)가 보낸 질의 답변에서 “클린턴 후보는 지역 연방준비은행(이하 연은) 이사회에서 금융업자를 제외하는 것을 비롯해 상식을 바탕으로 한 연준의 개혁이 그동안 지연돼 왔다고 생각한다”며 “연준이 (금융업계뿐 아니라) 더 많은 미국인을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지역 연은 고위직에 금융회사 출신이 아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민주당 샌더스 후보는 더욱 과격하다. 그는 지난 1월 유세에서 “월스트리트는 탐욕과 사기, 부정직, 거만함으로 운영되는 산업이다. 대형은행과 기업의 탐욕이 미국의 구조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금융권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대통령이 되면 행정명령을 동원해서라도 1년 이내에 대형은행의 분사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할 정도다.
그는 연준에 대해선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NYT)에 게재한 칼럼을 통해 “월스트리트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연준을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샌더스의 비판에 대해 이례적으로 “연준은 대형은행을 아주 잘 관리감독하고 있다”고 반박했을 정도다. 샌더스는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확률이 높지 않지만, 힐러리와 손잡고 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저학력·저소득 백인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화당 트럼프 후보도 연준에 우호적이지 않다. 트럼프는 5월 5일 경제전문방송 CNBC에 출연해 옐런 의장에 대해 “공화당원이 아니다”라며 “(2018년에) 임기가 끝나면 교체하는 게 적절하다”고 했다.
미국의 금융업계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다수당을 확보한 공화당’ 조합에선 공화당이 추진한 ‘기계적’ 통화정책이 도입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하원에선 빌 후이젠가 공화당 의원 등 21명이 공동 발의한 ‘연방준비제도 감독과 현대화 법률’이 가결됐는데, 미국 기준금리를 지금처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결정하지 않고 경제 지표를 기준으로 공식을 만들어 기계적으로 금리를 조정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금융위기가 다시 발생하려고 할 때 연준이 자금난을 겪는 금융회사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 법안을 주도한 공화당 내 강경 보수파들은 연준의 운영이 투명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백악관 예산관리국은 이 법안이 의회 절차를 모두 거쳐 대통령에게 송부되면 거부권 행사를 권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옐런 연준 의장은 “(이 법안은)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방준비은행 주주는 은행
미국 대선후보들이 연준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가진 특징 때문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국엔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 ’일본은행’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의 명칭을 가진 은행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을 12개 ‘연방준비구’로 나눠 각각 한 개씩 총 12개의 연은과 워싱턴에서 전체 시스템을 감시하고 운영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있다.
연은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연은의 주식은 각 연은이 관할하는 구역의 개별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다. 연은은 주주인 민간 은행이 출자한 금액에 대해 연간 최대 6%의 배당도 실시한다. 다만 개인이나 비금융회사는 주식을 가지지 못한다.
클린턴이 비판한 것은 여기서 비롯되는 문제다. 연은이 민간 은행 소유이기 때문에 고위직에 금융회사 출신 인사가 진출하고,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 이사는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 그런데 연은 총재는 해당 지역의 연은 이사회에서 결정되고 연은 이사의 3분의 2는 지역 은행들이 선출한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티머시 가이트너는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뉴욕 연은 총재를 맡았다. 그가 뉴욕 연은 총재로 있을 때 이사회에는 2008년 9월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최고경영자(CEO)였던 리처드 풀드와 골드만삭스 전 회장 스티븐 프리드먼 등이 있었다.
티머시 가이트너에 이어 뉴욕 연은 총재를 맡고 있는 윌리엄 더들리는 골드만삭스의 이코노미스트 출신이다. 제임스 고먼 모간스탠리 회장은 올해부터 3년간 뉴욕 연은 이사를 맡는다. 이 때문에 뉴욕 연은의 의사 결정이 월스트리트 은행 쪽으로 치우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월스트리트의 대형은행 대표가 뉴욕 연은 이사로 선출된 것은 2012년 임기 만료로 물러난 제임스 다이먼 JP모간 회장 이후 3년 만이다.
특히 뉴욕 연은 총재는 다른 연은 총재보다 권한이 더 커 비판의 대상이 된다. 미국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 참석하는 12명의 위원 중 5명이 연은 총재 몫으로 할당돼 있는데, 뉴욕 연은 총재는 FOMC 부의장이어서 고정적으로 의결에 참가한다. 나머지 11명의 연은 총재는 돌아가면서 4명이 위원이 되는 구조다.
연은이 민간 소유라는 점 때문에 연준은 각종 음모론의 대상이 돼 왔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화폐전쟁>이나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 영화 <시대정신(Zeitgeist)>은 연준이 극소수 금융 자본가들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화폐전쟁>을 쓴 쑹훙빙(宋鴻兵)은 책에서 “씨티은행은 뉴욕 연은 지분의 4분의 1을 갖고 있고 사실상 연은 총재 후보 결정권을 갖게 됐다. 미국 대통령의 임명 절차 청문회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미국 연은이 없었다면 제1차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등의 주장을 했다.
연준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연준은 홈페이지에서 연은의 소유 구조와 관련해 “연은은 회원 은행에 주식을 발행하고 있다”면서도 “연은의 주식은 민간 기업의 주식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연은은 수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연은의 주식은 팔 수 없고 거래될 수도 없으며 담보로 제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은이 민간 소유라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1694년 출범할 때는 민간 소유였고 1946년에 국유화됐다. 일본은행은 자본금 1억엔 중 55%는 정부가 출자했고 나머지 45%는 민간 소유다. 이 45%의 지분에 대해선 일반 주식회사의 주식에 해당하는 ‘출자증권’이 발행돼 일본 주식시장에서 주식에 준해서 거래가 된다. 작년 3월 말 현재 45%의 민간 소유 출자금 중 개인이 소유한 출자금이 40.1%포인트이고 금융기관은 2.2%포인트를 갖고 있다. 일본은행이 거둔 이익은 출자금액의 5% 이내에서 출자자에게 배당도 된다. 한국은행은 ‘한국은행법’에 따라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돼 있다. 출자해 주식을 보유한 주주 또는 주인이 없다는 뜻이다.

“은행 이익만 대변한다” 비판 많아
2011년 9월 뉴욕 맨해튼에선 두 달 넘게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켜 미국 경제에 큰 피해를 입히고도 일부 경영진이 금융회사에 투입된 세금으로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하는 등 부도덕한 모습을 보고 반감을 갖게 됐다. 시위대는 1%의 금융 거부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하는 현실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99%다(We are the 99%)’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월스트리트에 대한 반감은 클린턴 후보의 비호감 이미지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국 대선후보 중 가장 월스트리트에 우호적인 클린턴 후보가 연준 지배구조 개혁 이슈를 들고 나온 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
월스트리트의 정치 후원금은 클린턴 후보에게 집중되고 있다. 5월 9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비영리 정치자금 감시단체인 CRP 집계 결과 현재까지 클린턴 후보가 월스트리트에서 받은 후원금은 총 420만달러(약 50억원)에 달하고, 이 중 34만4000만달러는 지난 3월 한달 동안 받았다. 월스트리트가 3월에 지출한 후원금의 53% 규모다. 반면 트럼프 후보는 3월까지 월스트리트 총후원금의 1% 이상을 받은 달이 한 번도 없다.
또 클린턴 후보는 2013년 국무장관에서 퇴임 한 뒤 골드만삭스에서 3차례 강연을 하고 67만5000달러(약 8억원)를 받았다. 그는 어떻게 그런 많은 금액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만큼 줬다”고 답했다. 트럼프 후보는 “힐러리가 자신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조종당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100% 맞다”고 힐러리를 공격하고 있다. 미국 국민들이 품고 있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현재 클린턴 후보는 골드만삭스에서 한 연설문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 힐’은 공화당 실무자들이 연설 원고나 연설 일부가 기록된 노트, 녹음 기록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원고가 공개될 경우 ‘반(反)월스트리트’가 화두인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가 타격을 입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분석이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클린턴 후보가 연준 개혁을 거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