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MDM 그룹 회장은 우리나라도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국제적인 랜드마크 복합빌딩을 만들어 도시를 관광상품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고운호 객원기자>
문주현 MDM 그룹 회장은 우리나라도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국제적인 랜드마크 복합빌딩을 만들어 도시를 관광상품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고운호 객원기자>

부동산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문주현 MDM(Moon Development & Marketing) 그룹 회장의 집무실은 서울 강남 한복판인 역삼동 카이트타워 20층에 있다. 집무실에 있는 대형창으로 역삼동 일대 아파트 단지와 수많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국내 1, 2위 디벨로퍼(developer·부동산 개발 전문가)를 다투는 그는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지”라고 강조한다.

입지를 강조하는 부동산 전문가의 집무실이 역삼동에 있으니 역삼동이 새삼스럽게 서울의 알짜 지역으로 느껴졌다.

문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로도 불린다. 남들보다 늦게 일반 월급쟁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30대 후반에 임원 자리에 올랐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던 1998년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만든 회사는 지금 한 해 매출액 수천억원을 기록하는 부동산개발회사가 됐다.

부산 해운대의 대우월드마크 센텀, 판교 푸르지오월드마크, 광교 레이크파크 등 지금까지 문 회장의 손을 거친 사업장은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시장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했다.

부동산 디벨로퍼로서 성장가도를 달린 문 회장은 더 큰 도약을 준비 중이다. MDM 그룹을 부동산금융종합그룹으로 키우는 일이다.

MDM 그룹은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는 MDM 외에 한국자산신탁(한자신), 한국자산캐피탈, 한국자산에셋운용을 자회사로 두고 있고 한자신은 다음달 코스피 상장을 앞두고 있다.

지난 3일 집무실에서 만난 문 회장은 디벨로퍼답게 도시를 관광상품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나 홍콩 등은 도심재생을 통해 랜드마크를 지으며 도시를 가꾸고 있는데 우리도 도시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14년 3월부터 부동산개발협회장도 맡고 있는데, 협회장으로 가장 역점을 두는 것 중 하나도 도심재생이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업계의 의견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했다.

MDM이 2007년 부산에서 선보인 ‘해운대 월드마크 센텀’전경. MDM 그룹은 이 사업을 계기로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사진 : MDM 그룹 >
MDM이 2007년 부산에서 선보인 ‘해운대 월드마크 센텀’전경. MDM 그룹은 이 사업을 계기로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사진 : MDM 그룹 >


디벨로퍼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행사는 아파트 단지나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땅을 마련하고 인허가를 받는 작업을 합니다. 하지만 디벨로퍼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를 국제도시로 만든 리콴유 전 총리나 박정희 전 대통령도 크게 보면 디벨로퍼입니다.
부동산 개발사업은 토지라는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고 한 번 만들면 20년 이상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디벨로퍼는 그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동안 MDM이 내놓은 부동산은 대부분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성공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무엇보다 최고의 입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금은 관심을 못 받지만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이 디벨로퍼에게는 필요합니다. 소비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입지는 친환경적이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공원, 숲, 호수가 있고 백화점이나 복합쇼핑몰이 가까이 있는 역세권을 일차적인 사업부지로 고르고 있습니다. 상품은 내가 만들지만 선택은 소비자의 몫입니다. 아파트 주방의 창 하나를 만들 때도 고객의 입장에서 봐야 합니다.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되고 고객의 좋은 평가와 성공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려고 노력한 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벨레상스호텔(옛 르네상스호텔) 부지를 인수해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를 짓겠다고 했다가 포기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처음에 구상한 것은 일본의 도라노몬힐스와 같은 복합빌딩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저층부는 상업시설, 가운데는 사무실과 호텔, 고층부엔 주거시설을 넣는 것이죠.
그런데 건물 최고 층수가 37층으로 묶여 있어서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지금 세계는 도시 전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도시 경쟁력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메가시티(Mega City), 복합화가 현재 도시 발전의 추세입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 홍콩 등을 보면 랜드마크 복합빌딩이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위해서도 국제적인 랜드마크 복합빌딩이 필요합니다.
관광은 크게 자연 관광과 도시 관광이 있는데, 우리는 도시 관광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은 민간만 노력해서도 안 되고 관(官)만 노력해도 안 됩니다. 민관이 합동해야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재개발, 재건축 등 도시재생 사업이 정치적 변수에 의해 많이 좌우됩니다. 도시재생사업이 활성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도심재생 사업은 시간이 오래 필요합니다. 장기 사업은 대외 변수에 의해 사업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외 변수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무엇보다 도심재생 정책에 대한 큰 밑그림이 필요합니다. 또 정부는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야 합니다.
민간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개발자에 대한 인센티브와 이익환수의 기준도 명확해야 합니다.”

MDM 그룹이 2011년에 인수한 한국자산신탁은 다음달 코스피 상장을 앞두고 있다.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국자산신탁 사옥 전경. <사진 : MDM 그룹>
MDM 그룹이 2011년에 인수한 한국자산신탁은 다음달 코스피 상장을 앞두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국자산신탁 사옥 전경. <사진 : MDM 그룹>

앞으로 부동산 경기가 과거처럼 호황을 누리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부동산 시장을 어떻게 보시나요.
“지금은 양적 성장이 끝나고 질적 성장으로 변하는 과도기여서 분명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부동산 시장이 변할 겁니다. 이제는 공급을 따라가는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는 부동산 개발이 필요합니다. 급격히 늘어나는 1~2인 가구용 강소주택이 대세가 되고 있는 것도 한 사례죠.
주택 경기는 전반적으로 부침이 있다 해도 지역별 차별화와 양극화는 더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들이 많이 입주하는 마곡지구나 벤처타운이 들어선 판교지구, 대규모 유통시설이 있고 서울 접근성이 좋은 삼송지구, KTX역이 개통되는 수서나 현대차가 개발을 시작하는 삼성동 등은 부동산 경기침체와 관계없이 호황을 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으로 취임한 지 2년이 넘었습니다. 남은 임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존의 부동산 개발사업은 고성장 시기에 공급 위주의 택지개발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도시화율이 90%에 육박한 현시점에서 이런 방식의 개발사업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지금은 점점 노후화되고 낙후되는 기존 도심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도심 재생산업이 적극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향후 도시와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도심재생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한 정책들이 잘 갖춰져야 합니다. 협회장으로서 정부에 제도 개선을 건의하고 업계의 협력을 위해 노력할 예정입니다. 또 우리나라에도 개발, 컨설팅, 금융, 자산운용, 관리, 임대서비스 등을 한 번에 제공하는 선진국형 대형 부동산 회사가 나와야 합니다. 새로운 대형 부동산 개발회사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MDM은 부동산 개발 회사에서 부동산개발금융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향후에 더 확대하려는 분야가 있나요.
“앞으로는 부동산 개발사업이 점점 대규모 복합사업으로 변할 겁니다. 대규모 자금력을 투입하고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을 중재할 수 있는 신탁 중심의 개발사업 구조가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부동산 개발은 금융과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가 생기기 때문에 이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생각입니다. 또 문화나 IT 등과 융복합할 수 있는 방안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장학재단 사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키울 계획이신가요.
“저도 대학시절에 장학재단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약속했습니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벌면 나도 꼭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세상은 나누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60세가 될 때까지 장학재단출연금을 100억원으로 만들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이미 200억원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만 지원하고 있는데,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사회 공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학재단은 학생들만 지원할 수 있어서 문화, 예술 분야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 문주현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경희대 회계학과, 나산그룹 상무, MDM 회장,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


문주현 회장은 누구

외환위기 직후 부동산 업계 진출 2007년 해운대 개발로 대박

문주현 MDM 회장은 1957년에 태어났지만 공식 출생연도는 1958년이다. 어려웠던 시절, 어린 자식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문 회장의 부모님이 이듬해에야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문 회장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는 대신 가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짓고 김과 미역을 양식했다. 위로 형과 누나가 각각 2명,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2명씩 있었지만 형제 중에서 가장 힘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약 3년간 농사를 짓고 김, 미역을 양식하던 문 회장은 도시로 떠나기로 했다.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지만, 평생 농사만 짓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농사나 양식은 자연재해가 오면 1년을 그냥 망친다. 자연과 싸우는 일을 자손 대대로 하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경쟁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서울에 연고가 없었던 문 회장은 국비 장학생으로 광주직업훈련원에 입학했다. 약 1년 6개월의 훈련원 생활은 새로운 자극이 됐다. 더 큰 무대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한 문 회장은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검정고시로 취득하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스물일곱살이 되던 1983년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했다. 그는“청소년 시기에 학교를 안 다니다 보니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꿈에 그렸던 대학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겐“대학만 보내주면 알아서 생활하겠다”고 약속한 탓에 손을 벌릴 수가 없었고 집도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문 회장은 둘째 형수가 입학 선물로 사준 야전 잠바를 여름만 빼고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대학 때는 커피 대신 늘 율무차만 마셨는데 율무차로 허기를 때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대학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마련했지만 생활비는 늘 부족했다. 몸이 아파 돈을 벌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독지가가 문 회장의 사연을 듣고 2년치 등록금을 모두 내줘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문 회장은“그때 그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도 나중에 돈을 벌면 꼭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는 2001년에 당시까지 번 돈 10억원 중에서 5억원을 출연해 문주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당시 직원들은“우리 사장이 회사를 키울 생각이 없는가보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회사는 더 커졌고 문주장학재단 기금은 현재 215억3000만원으로 불어났다. 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학생만 1746명에 달한다.

문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서른한살이던 1987년 3월, 나산그룹에 공채 2기로 입사했다. 당시는 취직이 잘 되던 시기라 대학을 졸업한 남자들은 26~27세에는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문 회장은“당시 내 나이면 보통 대리 정도였다. 나는 줄도 빽도 없으니 일로 승부를 보자고 생각했다. 일하다가 죽자고 생각했으니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나산그룹이 무너지기 전까지 7차례 특진을 했고 30대 후반에 임원이 되면서‘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승진하기까지 가장 오래 걸린 기간은 약 1년 6개월이었고 승진한 지 3~4개월 만에 승진하기도 했다.

일에 미쳐 살던 1992년, 문 회장은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쓰러져 1년간 혼자 고향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당시 첫째 딸은 세살이었고 둘째 딸은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는“평상시에 몰랐던 가족의 소중함을 그때 느꼈다. 어린아이 때문에 좀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문 회장은 1998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MDM을 만들었다. MDM은 2007년 해운대 월드마크 센텀 사업을 계기로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중 한 곳이 됐고 지금은 부동산금융종합그룹으로 변신을 시도 중이다. 문 회장은 2014년 3월 제3대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으로 취임했고 올 1월부터는 14대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장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