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2월 21일은 대우증권 본입찰 마감일이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인수가격으로 2조4000억원을 써내도록 지시했다. 이변이 없는 한 대우증권 인수전 승자는 미래에셋증권이 될 터였다. 대우증권 인수는 미래에셋이 또 한차례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사흘 후인 12월 24일, 미래에셋증권은 한국투자증권과 KB금융지주를 제치고 대우증권 인수전의 최종 승자가 됐다. 금융계는 물론 미래에셋증권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 애초 사내에서는 박 회장이 대우증권 인수에 2조원 초반을 쓸 것으로 생각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기껏해야 2조2000억원이 인수 최고가라는 말이 돌았다. 2조4000억원. 대우증권을 반드시 인수하겠다는 박 회장의 의지는 그만큼 강했다.
미래에셋은 18년 전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산운용·증권·보험사를 중심으로 운용자산만 357조원에 이르는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이후 금융에서 태어난 거대 독립금융그룹은 미래에셋이 유일하다. 지난해 KDB대우증권(이하 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자기자본 8조원의 초대형 증권사 출범도 앞두고 있다.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의 통합 작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7월 금융위원회의 합병 승인과 9월 합병 주주총회 등을 거쳐 11월 자기자본 8조원의 압도적인 국내 1위 증권사가 출범한다. 1997년 박현주 회장이 동원증권을 퇴사하고 8명의 동료와 의기투합해 미래에셋을 설립한 지 18년 만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대우증권은 지난달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을 변경한 후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개최해 박현주 회장을 회장으로 선임하기로 의결했다.
미래에셋대우가 존속법인으로 남고 미래에셋증권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병이 확정됐다. 통합 미래에셋대우는 오는 11월 1일 정식으로 출범한다. 미래에셋대우의 자기자본은 2조원의 자기주식을 포함해 총 7조8000억원에 이른다. 자기자본 규모로 국내 2위인 NH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4조5000억원, 지난달 현대증권을 인수하며 3위로 뛰어오른 KB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4조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박현주 1호’로 뮤추얼펀드 열풍 주도
미래에셋증권은 대우증권을 합병하게 되면서 그 동안 약점으로 지목돼 온 투자은행(IB)과 주식중개 사업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게 됐다. 강점이었던 자산관리와 연금 등에서의 사업에 이어 IB와 주식중개, 해외투자 등에 이르기까지 증권업의 주요 사업들에서 모두 업계 선두권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애초 금융시장에서는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미래에셋증권이 다소 힘에 부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경쟁 상대였던 KB금융지주는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금융투자업에서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한 베팅에 나설 것으로 전망됐고 한국투자증권 역시 IB와 개인고객 대상 주식영업에서의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대우증권 인수에 상당한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미래에셋은 본입찰 직전까지 대우증권 인수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박현주 회장의 주도로 미래에셋 경영진들의 대우증권 인수작업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미래에셋은 앞서 지난해 8월 인터넷전문은행 진출을 포기하면서 일찌감치 대우증권 인수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본입찰이 시행되기 한 달 전에는 9561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며 차분히 대우증권을 손에 넣기 위한 ‘실탄’을 확보했다. 이후 KB금융지주와 한국투자증권이 대우증권 인수에 필요한 ‘적정 가격대’를 고민하는 사이 미래에셋은 예상을 뛰어넘는 2조4000억원의 가격을 제시하며 결국 국내 증권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빅딜에서 최종 승자로 남게 된 것이다.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의 새 주인으로 결정된 후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박현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그는 증권사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30년간 여러 차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적이 많았다.
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승부수는 적중했다. 동원증권에서 그는 주식운용과 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불과 서른두살의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 타이틀을 달았고 몇년 지나지 않아 임원이 됐다. 베팅은 멈추지 않았다. 박 회장은 보장된 성공가도를 포기하고 1997년 돌연 창업을 선언하며 미래에셋벤처캐피탈을 만들어 독립했다. 이어서 미래에셋투자자문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증권 등을 잇따라 설립해 일찌감치 금융그룹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국내 최대 운용사로 성장… 생보사도 설립

박 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박현주 1호’를 출시해 뮤추얼펀드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해외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미래에셋인디펜던스’ 주식형 펀드와 ‘미래에셋디스커버리’ 주식형 펀드 등 히트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국내 펀드시장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운용사로 성장했다. 2005년에는 미래에셋생명을 설립하고 사모펀드(PEF)를 통해 미국의 골프용품 제조사 타이틀리스트를 인수하는 등 금융그룹 전체의 규모도 계속 확장했다.
그러나 박 회장의 과감한 승부수가 언제나 성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설립 초기부터 별다른 어려움 없이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던 박 회장과 미래에셋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주식이나 채권 등 자산의 제약 없이 세계 여러 나라에 분산 투자한다는 전략으로 지난 2007년 출시돼 수조원의 투자금이 몰렸던 ‘인사이트 펀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큰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주요 투자 대상이었던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인사이트 펀드는 출시 1년 만에 수익률이 ‘반토막’이 났고, 투자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비난이 뒤따랐다. 박 회장은 한동안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도 했다. 대우증권 인수 이후 증권사의 규모를 키우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금융그룹 전체로 봤을 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미래에셋그룹의 주력이었던 자산운용의 경우 수년간 코스피지수가 2000선에서 옆걸음하는 사이 국내 펀드시장이 침체를 겪기 시작하면서 최근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 통합 미래에셋대우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미래에셋과 대우증권 직원들 간의 ‘DNA 통합’에 성공해야 하는 점도 숙제로 남아 있다. 대우증권 노조와 직원들은 미래에셋의 통합 작업이 일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래에셋대우가 의도했던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두 회사의 진정한 DNA 통합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한다”며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강한 공채 문화를 가진 대우증권 직원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미래에셋의 색채를 입힐지를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에셋그룹은 자산운용·증권·보험 3개의 축을 중심으로 2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운용 자산만 357조원에 달한다. 1997년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한 ‘미래에셋캐피탈’이 18년 만에 미래에셋그룹이라는 이름의 재계 서열 33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미래에셋의 지배구조는 박현주 회장 1인 중심으로 되어 있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컨설팅,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대주주로 미래에셋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래에셋캐피탈이 미래에셋증권 지분 36.23%, 미래에셋생명 지분 15.29%를 소유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미래에셋생명 지분 16.64%를 갖고 있다. 지배구조의 정점인 미래에셋캐피탈은 박현주 회장이 지분 48.69%를 갖고 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지분 60.19%도 소유하고 있다. 박 회장이 지분 48.63%를 보유하고 있는 미래에셋컨설팅은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단일 2대주주로서 각각 14.16%, 32.92%의 지분을 갖고 있다. 미래에셋그룹 지배구조 측면에서 미래에셋컨설팅은 박 회장의 뒤를 받쳐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미래에셋은 지배구조상 풀어야 할 숙제도 안고 있다.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으로 여신전문금융회사의 계열 출자 총액이 200%에서 150% 이내로 제한됐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래에셋캐피탈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의 장부가액은 미래에셋캐피탈 자기자본의 200%에 달하고 있다. 실질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미래에셋캐피탈은 증자로 자본을 확충하거나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
박현주 1인 지배체제 강화
박현주 회장은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유능하다고 판단되면 당장 영입에 나설 정도로 인재 욕심이 상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을 인수하기 전까지 그룹의 중심이 돼 왔던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설립 초기부터 박 회장이 영입한 젊은 펀드매니저들에 의해 불과 몇년 만에 국내 자산운용업계 1위로 성장했다.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을 설립한 후 한국투자신탁운용 펀드매니저로 일하던 김영일씨를 영입해 수석운용팀장 직책을 맡겼다. 김영일 매니저는 1990년대 말 미래에셋이 처음 출시한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 등을 운용하며 초창기 미래에셋을 대표하는 펀드매니저로 이름을 날렸고 KB자산운용과 한국투신운용 투자책임자(CIO)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미래에셋에 합류해 운용 본부장을 맡으며 ‘스타 펀드매니저’로 이름을 날렸던 이병익씨는 현재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로 자산운용업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장기신용은행에서 일하다 1998년 미래에셋자산운용에 합류한 손동식 매니저는 주식운용팀장과 투자책임자(CIO), 부사장 등을 거친 뒤 2012년부터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 부문 대표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주식운용팀장과 이사 등을 지냈던 선경래씨는 독립해 선물·옵션 전업투자로 크게 성공했고 2008년 속옷 제조업체 좋은사람들을 인수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주식운용팀장을 지냈던 김태우씨는 현재 KTB자산운용 대표로 일하고 있다.

신성장 벤처에 10조 투자 계획
미래에셋인디펜던스와 미래에셋디스커버리 등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주력 펀드들의 운용을 책임졌던 박건영씨는 2009년 브레인투자자문을 설립해 독립했다.
현재 미래에셋그룹은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부회장과 정상기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 등 3인 부회장 체제다. 그러나 최 부회장과 정 부회장 등이 박 회장에 대한 충성심이 두텁고 그의 뜻과 경영철학을 앞장서 시행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3인 부회장 체제는 1인자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균형보다는 ‘박현주 1인 지배체제’의 효율성을 강화하는 데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분석이 많다.
이 밖에 미래에셋증권 공동 대표로 일하다 올해 미래에셋생명 법인총괄 대표로 자리를 옮긴 변재상 사장, 1999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마케팅팀장으로 합류한 후 2010년부터 미래에셋 대표를 맡고 있는 조웅기 사장 등도 박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들로 꼽힌다.
박현주 회장은 지난달부터 미래에셋대우 회장을 맡은 뒤 적극적으로 대우 출신 끌어안기에 나서고 있지만 증권업계에서는 물밑에서 박 회장의 경영과 투자철학에 맞지 않는 인물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박 회장은 최근 미래에셋그룹의 새로운 성장 전략을 밝혔다. 그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국내 1등 증권사 미래에셋대우증권 출범을 계기로 ‘대한민국 신성장 벤처펀드(가칭)’를 조성해 매년 1조원씩 10년간 총 1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투자 대상은 바이오, 헬스케어, 전기차, 자율주행차, 콘텐츠 분야의 창업 초기 기업이다. “증권사 수익을 사실상 전액 신성장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지난 2012년 11월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전 부회장(현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 대표)의 사임이 큰 화제가 됐다.
구 전 부회장은 지난 1997년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 박현주 회장과 함께 미래에셋을 세운 ‘창업공신’이기 때문이다. 구 전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난 것을 두고 미래에셋을 잘 아는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박현주 1인 지배체제’의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박현주와 구재상 그리고 지금도 미래에셋의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최현만 등 창업 멤버 세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회장이 동원증권에서 강남본부장으로 일하던 당시 압구정지점장이 구재상 전 부회장, 서초지점장이 최현만 부회장이었다.
박 회장은 강남본부장으로 일하며 눈 여겨 봤던 두 사람과 함께 1997년 독립해 미래에셋을 창업한다. 박 회장이 회사의 창업과 경영을 앞장서 이끈 가운데 구 전 부회장은 자산운용 부문을 맡아 펀드 운용을 실무적으로 진두지휘했고 최 부회장은 증권 부문 대표로 묵묵히 금융상품 판매와 회사의 안살림을 도맡으며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사람을 묶는 키워드는 동원증권 외에 또 있다. 이들이 모두 호남 출신이라는 점이다. 박 회장은 광주 출신으로 지역 명문인 광주일고를 졸업한 대표적인 호남 인재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남 화순 출신인 구 전 부회장은 광주 대동고를 나왔고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최 부회장도 광주고를 졸업했다. 세 사람 외에도 초창기 미래에셋그룹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호남 출신이 많았다. 1999년부터 미래에셋에 합류해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를 맡고 있는 정상기 부회장도 전남 순천 출신이다. 2000년부터 미래에셋에 합류해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과 미래에셋캐피탈 대표 등을 역임하며 한때 ‘박현주의 집사’로 불렸던 박만순씨도 광주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