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적인 스타트업(초기 창업 기업) 열풍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등 1980년대 정보혁명 1세대 창업자들이 전설이 돼 가는 가운데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1998년 창업한 구글은 20년이 못 돼 기업가치가 600조원을 상회하면서 스타트업의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 1976년생 트래비스 칼라닉이 2009년 창업한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의 기업가치는 7년 만에 80조원을 넘었고, 2008년 창업한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는 8년 만에 기업가치 30조원을 돌파했다. 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인 유니콘 기업이 200개에 육박하고 그중 100개 이상이 미국 기업이다. 18세기 중반 산업혁명 이후 250여년 만에 기존 산업질서가 정보기술이 촉발한 플랫폼, 융합, 디지털 경제로 전환하고 있는 중심에 스타트업이 있는 것이다.
최근 스타트업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소프트웨어 일변도에서 탈피해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창업과 성공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워치의 선두주자인 페블(Pebble), 민간 드론시장의 70%를 장악한 중국의 DJI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킥스타터, 인디고고와 같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필요 자본을 쉽게 모집하면서 실수요자들까지 사전에 확보할 수 있게 된 점, 3D프린팅 등 디지털 제조기술로 낮은 비용으로 다양한 시제품의 생산이 가능해진 점, 시제품 생산에서 자재 공급, 제조, 마케팅에 이르는 공급사슬 전반을 대행해 주는 제조 플랫폼 기업 등장으로 스타트업의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점 등 크게 세 가지를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기존의 제조 전문기업들은 대기업의 주문에 따라 대량생산하는 사업모델이었는데, 새로운 플랫폼 제조기업들은 대량생산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을 위한 시제품과 다품종 소량생산도 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PCH 인터내셔널(PCH International)은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다.
중국 부품시장 직접 개척

1996년 아일랜드에서 부품조달 도매상으로 창업한 PCH는 현재 전 세계 50개 국가에서 2600여명을 고용하고 있다. PCH의 공급망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1000여개 기업은 4000만개 품목에서 연간 80억달러(약 9조원) 이상을 유통하거나 제조해 고객에게 전달한다. PCH가 흔하디 흔한 부품조달사업으로 시작해 스타트업 대상의 글로벌 제조 플랫폼 기업으로 부상한 비결은 글로벌 시장의 전개와 디지털 혁명이라는 두 가지 변곡점을 먼저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점이다.
PCH의 창업자인 리암 케이시(Liam Casey)는 아일랜드 코크 카운티(County Cork)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패션업계에서 10년간 근무했다. 1990년대 중반 29세 때 재충전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1년간 거주하면서 당시 급성장하던 컴퓨터 하드웨어 산업 주요 부품들의 생산지가 아시아라는 점에서 아시아의 부품을 서구 제조기업에 조달하는 사업의 가능성을 엿봤다. 아일랜드로 돌아와 무작정 수중에 있는 2만달러를 투자해 대만의 컴퓨터 부품을 조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당시 드라이브를 즐기던 고속도로 이름(Pacific Coast Highway) PCH를 회사 이름으로 했다. 컴퓨터 부품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는 사업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만 현지의 전자부품 박람회에 참석했다. 참가기업들의 부스를 빠짐없이 방문하고 명함을 받아 공장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중간과정 없이 신속하고 저렴하게 부품을 유통시키는 사업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조달처를 확보했으니 납품처를 확보할 차례였다. 케이시는 아일랜드에 제조기지를 둔 미국 컴퓨터 제조업체들을 방문하면서 문전박대를 당하던 중 마이크로폰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PC 제조기업과 납품계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점차 사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던 중 대만 거래처가 케이시에게 생산 공장을 중국 광둥성(廣東省) 둥관(東莞)으로 옮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둥관의 위치도 몰랐던 그가 중국에서 태동하던 제조업 생태계의 가능성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중국의 공장을 방문한 케이시는 다양한 부품을 신속하고 저렴하게 생산하는 능력에 감명받았고, 실력 있는 거래처 확보를 위해 중국 선전(深圳)지역의 공장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중국어 한 마디 못했지만 이미 수출을 시작하던 중국 공장의 간부급은 영어 구사가 가능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이 덕분에 케이시는 중국 제조업이 부상하기 전에 선전 지역의 주요 제조기업들과 신뢰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고 중국통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 1999년 애플과 대규모 납품계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서구 대기업들의 대(對)중국 창구로 인정받는 주요 인물로 부각되기도 했다.

배송 등의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PCH는 ‘PCH 액세스’를 통해
스타트업의 개발 전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 : 페블>
제품 생산까지 원스톱으로
부품조달 기업으로 강력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PCH는 안주하지 않고 제조업 공급사슬 전반에 걸친 엔드투엔드(end-to-end)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2003년 자체적인 물류 패키징 설비를 구축하고 기업간거래(B2B) 전자 상거래를 위한 주문이행센터(fulfillment center)를 개설, 처리 시간을 단축하고 재고관리 수준을 높였다. PCH의 네트워크에 속한 공장들과 패키징 설비 간 배송 시간이 최대 3시간이 넘지 않도록 조정했고 제품 포장 후 최종 배송이 3일 내에 완료되는 무(無)재고 경영을 실현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실시간 수요 대응이 가능한 유연하고 신속한 생산과 물류 체계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케이시는 재고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밝혔다. “2014년 아마존이 자체 스마트폰인 파이어폰을 출시했을 때 미국 전역의 55개 물류창고에 재고를 비축했지요. 말이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2주 만에 제품이 팔리지 않기 시작했고 아마존은 3억8000만달러의 재고를 손실처리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목표는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것입니다. 과잉 생산하길 원치 않지만 전 세계 어디나 배송할 수 있도록 합니다.”
PCH는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미국 실리콘밸리 하드웨어 스타트업들의 성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타트업들은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은 확보했지만, 시제품 대량생산 엔지니어링, 부품조달, 생산, 배송 등을 관리하는 공급사슬의 확장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2012년 페블은 크라우드펀딩으로 1000만달러에 8만5000건의 사전 주문을 받았지만 생산에 필요한 인프라가 부족해 제품 배송에 1년 이상이 소요됐다. 비록 성공적으로 제품 출시가 진행되긴 했지만 그동안 회사는 소비자들의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PCH가 2011년 시작한 ‘PCH 액세스(PCH Access)’는 스타트업이 시제품 단계에서 제품생산 및 배송에 이르는 개발 전(全)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도록 한 통합 플랫폼 서비스다. 이를 위해 PCH는 2012년 실리콘밸리 인근의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디자인 스튜디오 라임랩(Lime Lab)을 인수해 디자인과 생산 엔지니어링 서비스 역량을 확보하고 2013년에는 하이웨이1(Highway1)이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유망 스타트업들에 4개월간 전문가 상담을 해주고 자금조달, 시제품 제작 설비 사용 및 중국 부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 후 우수 스타트업들을 선정, PCH 액세스 프로그램으로 연결해 실제 제품 생산 및 사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PCH는 이에 대한 대가로 스타트업의 지분 4~7%가량을 받는다. 최근에는 전자상거래 플랫폼(Fab.com), 유통 및 주문처리사업(TNS)까지 추가해 하드웨어 제품의 디자인, 제조공정 설계, 포장, 물류, 유통까지 제조업에 대한 엔드투엔드 서비스 체계를 완비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업체 나올 듯
PCH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위한 플랫폼 사업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우수한 스타트업을 발굴해 PCH의 생태계에 편입시켜 미래의 고객을 확보하는 선순환을 지속하면서 스타트업 성공에 따른 투자 수익도 기대하는 사업모델이다. 스타트업을 통해 첨단기술의 발전 동향을 살펴보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공급받아 계속해서 조직의 활력을 유지하는 효과는 덤이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독자적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공급사슬을 PCH를 통해 이용하면서 시행착오 없이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부품조달 사업에서 시작해 20년에 걸쳐 제조업 생태계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PCH는 다음 목표를 세웠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제품이력 추적(traceability)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제품의 원천은 무엇이고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죠.” 케이시는 고객들이 점점 더 친환경을 의식하고 있으며, 제품의 전체 생산 및 배송 과정을 첨단기술을 사용해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길 원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PCH는 이미 자사의 많은 제품에 저렴한 센서를 장착하고 있으며 다음 단계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추적기를 추가할 계획이다. 또 제품과 주요 부품의 제조 시기, 이동거리 등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도록 공급사슬의 투명성을 높여 고객 신뢰를 높일 예정이다.
21세기의 제조업 환경에서 제조업의 포지션도 최종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거나 플랫폼을 형성해 허브가 되는 등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특히 규모의 경제 장점을 가진 대기업들은 분산화가 심해지는 제조업 하류 부문에서 이들 사업자들에게 인프라나 통합 플랫폼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모델을 전환하면 상류 부문에서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 스타트업들의 가능성도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구글이 스타트업 지원공간인 ‘구글 캠퍼스’를 미국 실리콘밸리,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번째로 서울에 2015년 5월에 개설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국내 스타트업들이 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에도 PCH와 같은, 스타트업을 위한 플랫폼 사업자가 출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은 상황이다.
▒ 박종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경영학,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딜로이트 컨설팅
PCH 창업자 리암 케이시
20년간 中 선전서 주로 생활 1200개 공장 네트워크 구축
‘제조업계의 구루(Guru)’‘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개척자’. 국내에서는 생소한 이름인 리암 케이시(Liam Casey·50) PCH 인터내셔널 창업자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 주요 외신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아일랜드에 PCH 본사를 두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3개나 들고 다니며 중국 선전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본사가 있는 아일랜드 코크와 선전, 샌프란시스코의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에 3개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원래 패션학교에 다니고 패션업계에 10년이나 종사했었다. 제조업과 중국에 대해 사실상 문외한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삶에 반전을 준 계기는 휴식차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무역회사에 잠시 근무했을 때 찾아왔다. 중국으로 출장 갔다가 중국 업체들이 서구 회사들의 아웃소싱을 맡기 시작한 현장을 목격하고 사업 기회를 발견한 것이다. 케이시는 곧장 아일랜드로 돌아가 PCH 인터내셔널을 차렸다.
그는 20년간 선전에서 살다시피 하며 중국 공장 1200여곳과 네트워크를 구축, 제조 노하우가 없는 기업들과 연결해주는 일종의 매치 메이커(match maker·중매인)’역할을 했다.
PCH 인터내셔널은 지난 5년간 6배 성장했으며, 2014년 기준 11억달러(약 1조27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