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윈스턴 처칠 지음 | 차병직 옮김
까치 | 상하권
각권 2만5000원

윈스턴 처칠은 1946년부터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해 총 6권으로 완간했다. 그는 이 책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57년엔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 중 핵심을 모은 발췌본도 냈다. 최근 그 발췌본을 차병직 변호사가 우리말로 옮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시작해 전쟁을 치른 고난의 시기를 거쳐 전후 냉전의 시작과 1950년 한국전쟁까지 회상한 기록이 담겨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이뤄진 연합국의 주요 군사 작전을 세밀하게 복원하고 그 전략과 전술을 상세하게 서술하기도 해 전사(戰史)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꼽혀왔다.

처칠은 이 회고록을 통해 일찍이 EU(유럽연합)를 예견한 것도 털어놓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과 영국 정부는 벌써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새로운 세계 정부를 이끌 ‘4개국 안’이란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처칠은 이 안을 검토한 뒤 외무장관 앞으로 각서를 보내 자신의 견해를 기록으로 남겼다.

“내 생각의 근본은 유럽, 즉 근대 국가와 문명의 어버이 대륙인 유럽의 영광에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음. 만약 러시아의 야만성이 유구한 유럽 국가들의 문화와 독립을 짓밟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재난이 될 것임. 지금 말하기는 어려우나, 나는 유럽 가족들이 하나의 유럽 회의 공동체 아래 공동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음. 나는 국가들 사이의 장벽이 최소한으로 낮아지고 무제한의 여행이 가능한 하나의 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기대하고 있음. 유럽의 경제가 하나의 전체로 연구되기를 희망함.”

처칠의 ‘유럽 합중국’ 구상은 장밋빛 환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194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유럽 합중국의 꿈을 펼치는 연설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 가족 공동체 재생의 첫 단계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 사이의 파트너십입니다.” 그 당시 연설을 들은 청중은 정말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포연이 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범 국가 독일을 유럽 공동체 건설의 주역으로 모시자고 하다니. 그러나 처칠은 남다른 안목으로 미래 역사를 내다봤다.

“제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유럽 합중국의 구조는 개별 국가의 생산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동등한 대우를 받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기여하는 바에 따라 가치를 인정받을 것입니다.”


유럽 통합 운동 주도한 처칠

처칠은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면서 철의 장막을 확대하자 더욱더 유럽 통합 운동을 강조했다. 미국이 유럽을 지원한 마셜 플랜도 이런 유럽 통합 운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처칠은 회고록에서 밝혔다. 처칠의 꿈은 하나씩 실현됐다. 1949년 유럽 의회가 생겼고 이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태동했다. 처칠이 1965년 세상을 뜬 뒤에도 유럽 통합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유럽연합(EU) 출범과 유로화 통용이 실현됐다.

그러나 최근 처칠의 이상은 70년 만에 무너졌다. 영국이 국민투표로 EU 탈퇴를 결정했다. 그 후폭풍으로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불확실성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벌써부터 유럽 대륙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금융 시장의 중심이었던 런던 대신 파리와 베를린이 새로운 금융의 중심으로 떠오를 조짐도 보인다. 영국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브렉시트(Brexit)’를 비난하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EU 잔류파들은 처칠의 회고록을 다시 읽으며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처칠은 1946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은 숨 돌릴 여유가 있습니다. 포화는 멈췄습니다. 싸움은 중단됐습니다. 그러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유럽 합중국을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이름이 무엇이 되든 그와 유사한 기구를 만든다면,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