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단 기술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든다. 최근 몇년 사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이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에 주목한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시장을 파괴할 수 있는 신기술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어떤 기술은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고 수익을 내는데, 어떤 기술은 시장에 자리잡을 때까지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린다. 심지어 시장에 발도 붙이지 못한 채 퇴출되는 기술도 있다. HDTV는 1981년 미국에서 처음 개발됐지만 2000년대 들어서야 상용화됐다. 2001년 처음 등장한 1인용 전기 스쿠터 세그웨이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 등 혁신의 아이콘으로부터 극찬받았지만 이동수단 혁명을 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혜성처럼 등장하자마자 성공하는 신기술, 그리고 분명 새로운 기술인데도 시장에선 실패하는 기술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울 카푸어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부교수는 론 애드너 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교수와 2015년 발표한 ‘혁신 생태계와 기술 대체의 속도(Innovation Ecosystems and the Pace of Substitution)’라는 논문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봤다.
신기술 성공 여부, 생태계 구축에 달렸다
신기술의 성공은 기술이 적용될 생태계가 잘 짜여 있느냐에 달렸다.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를 예로 들어보자. 두 종류의 차종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하이브리드차에 비해 전기차 판매량이 훨씬 적다.
현대차 산하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집계를 보면 2014년 기준 세계 친환경차 판매량 195만 1000대 가운데 하이브리드차가 165만4000대로 전체 판매의 84%를 차지했다. 전기차 판매량의 비중은 8.9%에 불과했다.
이 차이를 가져온 것이 바로 기술 생태계의 구축 여부다. 내연엔진과 전기차 배터리를 함께 갖고 있는 하이브리드차는 주유소만 있는 지역에서도 당장 운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기차와 다르다. 하이브리드차는 기존 생태계와 새 생태계에서 모두 활용할 수 있지만 전기차는 새 생태계가 자리잡기 전까진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곧바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신기술과 그렇지 않은 신기술을 구분하려면 기술의 생태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기술 자체에만 집중하면 그 기술이 향후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지, 혹은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좋은 기술도 시장에서 거부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새 생태계와 기존 생태계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생태계가 구축되지 않은 신기술을 평가할 때는 그 생태계 구축을 위한 투자 비용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전기차 배터리에 도입할 신기술을 평가한다면 배터리 충전소와 전기차 정비소 구축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기술이 등장했다고 해서 기존 생태계가 무너질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편견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울트라테크(Ultratech)라는 반도체 회사는 40년 동안 한 번도 신기술을 선도한 일이 없지만 꾸준한 수익을 내며 반도체 업계의 강자로 자리잡았다. 기존 기술을 꾸준히 개선하면서 내실을 다진 덕분이다. 또 10~15년 전만 해도 자동차 연비가 1갤런당 30~40마일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내연엔진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연비는 상상 이상으로 개선됐다.
이처럼 많은 기술 혁신이 기존 기술과 생태계를 토대로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신기술 전망이 좋다고 해서 기존 기술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신기술 수용, 처음엔 느리다 도약
신기술이 안정적으로 자리잡는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할 방법은 없을까. 현재는 장담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한 연구 결과는 있다. 기술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S자 곡선’을 그리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기술 도입 단계에서는 아무리 투자를 늘려도 성능이 크게 좋아지지 않는 시기가 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도약점(takeoff)이라고 부르는 구간에 이르고, 그때부터는 폭발적으로 성능이 좋아진다. 이런 시기를 거쳐 기술은 성숙기에 접어든다.
기술을 시장이 수용하는 과정 역시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기술이 처음 시장에 소개됐을 때부터 관심을 갖는 사용자가 있다. 이들은 그 기술의 가치를 잘 모르지만 단순히 신기술 자체에 열광하는 사람이다. 수가 많지는 않다. 이런 사용자를 거친 기술은 다음 단계에서 주류 사용자에게로 넘어간다. 주류 사용자는 단순히 기술이 새로운지 아닌지만을 따지지 않는다. 그 기술이 기업의 가치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까지를 따져보는 사용자다. 이들이 기술을 받아들이면 사용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술의 도입 역시 S자 곡선을 그리게 된다는 얘기다.
큰 틀에서는 이런 형태가 관찰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어떤 기술은 도입 후 3~5년 사이 성숙기에 이르지만 어떤 기술은 적응기만 수년이 걸린다. 어떤 기술은 아예 시장에 발도 붙여보지 못한 채 퇴출된다. 기술 자체가 폐기되기도 한다. 휴대전화는 오랜 기간 많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상용화로 한순간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런 경우는 S자 곡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 사례에 속한다.

신기술 도입 타이밍 놓친 코닥의 파산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 기업 경영자가 신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기술의 도입 시점을 정하는 일이다.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기술 동향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생태계 구축 정도를 파악해 신기술의 도입 시점을 정확하게 읽어내야 한다. 신기술을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할지, 현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나을지, 아니면 신기술을 기존 기술과 접목할 방법을 찾는 편이 좋을지 등 여러 선택지 가운데 가장 현명한 방법을 찾아 결정해야 한다.
1892년 창업 이래 110년 이상 필름과 인화지 시장 세계 1위를 지켰던 코닥(Kodak)은 ‘타이밍’을 판단하는 경영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 회사는 디지털 카메라 시대로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판(誤判)이었다. 코닥은 1981년 이미 디지털 카메라의 위협을 정확하게 분석한 보고서를 만들어 회람했고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여러 원천 기술도 개발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필름 카메라 시장이 존재하는 한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보고 기존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유지했다. 그 결과는 파산이었다.
반대로 신기술을 무조건 빠르게 도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선점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라는 이론이 유명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그웨이처럼 너무 일찍 등장한 신기술이 정착하지 못하는 사례도 흔하다.
신기술이 적용될 수 있는 생태계의 장벽이 높을수록 기술 선점자가 후발주자보다 불리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도입하려는 신기술이 어떤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을지, 기존 생태계의 소비자에게 어떻게 다가가며 새 소비자는 어떻게 끌어올 수 있을지를 종합적으로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투자자가 신기술 한 가지의 효과를 낙관하며 수백만~수십억달러를 투자하곤 한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신기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다. 문제는 그 황금알을 언제 낳을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신기술 덕분에 생산성이 3배, 4배씩 좋아지기도 하지만 기술이 언제부터 상용화될지는 알 수 없다. 기술이 상용화되더라도 그 가치가 100% 드러나는 시점이 언제일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카메라를 소비자 손에 쥐어줬다고 하자. 카메라의 기능은 최신이지만 정작 카메라에 넣는 필름이 새 기능을 끌어내기에 부족한 수준이라면 사용자는 그 카메라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카메라가 진가를 발휘하는 시점은 필름이 개발되는 시점, 정확히는 개발된 필름이 상용화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기존 자동차 시장을 위협할 정도의 속력이나 안전성, 편의성을 확보하지 못해
대중화에 실패했다. 사진 왼쪽부터 세그웨이를 발명한 딘 카멘과 베조스의 모습.
<사진 : 블룸버그>
투자 대상은 기술 아닌 ‘생태계’
그러므로 투자자는 첨단 기술 자체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은 물론, 그 기술이 영향을 미칠 생태계의 요소, 새롭게 생겨날 기회까지 바라보고 투자에 나서야 한다.
전자잉크가 처음 나왔을 때 투자에 나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단순히 전자잉크 기술에 투자한 것이 아니었다. 전자잉크를 통해 성능이 좋아진 전자책 기기, 활성화되는 전자책 시장, 그 내용을 채우는 콘텐츠의 가능성을 함께 보고 투자한 것이다. 현재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으로 성장한 아마존의 사업 모델은 이런 생태계를 바라보고 만든 것이다. 지금 아마존은 콘텐츠 시장, 기기 시장 두 가지를 모두 쥐고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정책 입안가도 정확한 안목을 길러야 한다. 신기술이 기존 생태계에서든 새로운 생태계에서든 어떤 경제적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예측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신기술이 창출하는 경제적 효과가 언제부터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해야 경기 전망의 정확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술 생태계를 활용한 분석은 기업인과 투자자, 정책 입안가 등이 신기술 투자를 결정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큰 틀에 해당한다. 더 정확하게 신기술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연구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아직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어떤 형태로 시장에 수용되는지를 예측해내는 것이다. 전기차, 무인차 시대를 앞두고 여러 신기술이 나오고 있는 자동차 산업에 대한 예측 모델 만들기에 먼저 착수할 예정이다. 그 뒤로도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기기, 금융 기술까지 연구를 확장해 나가야 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