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총재는 최근 저물가의 원인으로 국제유가 하락을 꼽았다. <사진 :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6월9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총재는 최근 저물가의 원인으로 국제유가 하락을 꼽았다. <사진 :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6개월째 0%대 물가 상승률이 이어지고 있지만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진행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6월 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한 말이다. 그는 “현재 가격 하락이 특정 품목이나 소수 품목에 제한되고 있으며 근원 인플레이션이나 기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올해 연말쯤 물가 상승률이 1%대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아시아의 디플레이션: 위험은 잊혀져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 전반적으로 디플레이션이 퍼지고 있고 경제성장을 위협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12월 서울 신천동 롯데마트 월드타워점에서 한 고객이 양파를 고르고 있다. 당시 양파와 배추, 돼지고기, 쇠고기 등의 가격이 두드러지게 올랐다. <사진 :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지난해 12월 서울 신천동 롯데마트 월드타워점에서 한 고객이 양파를 고르고 있다. 당시 양파와 배추, 돼지고기, 쇠고기 등의 가격이 두드러지게 올랐다. <사진 :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韓銀 “저물가는 저유가 따른 일시적 현상”

물가 상승률 지표는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생산자물가지수(PPI)’ 두 가지가 있다. 이 총재가 말한 물가 상승률은 소비자물가지수를 말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다. 올해 상반기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8~1.3%로 한은의 목표치(2.0%)를 크게 밑돌았다.

한은은 물가 상승률이 낮은 것은 저유가 때문이고 내년에는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총재는 7월 14일 물가안정목표제 운영상황 관련 설명회를 열어 “올 상반기 국내 석유류 가격이 1~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8%포인트 정도 낮춘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35%쯤 저렴하다. 이번 상반기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물가 상승률은 1.7%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싱가포르와 태국의 소비자물가는 각각 0.5%, 0.9%씩 하락했다. 중국(1.4%), 필리핀(1.4%), 일본(0.8%)도 낮은 수준이다. 생산자물가 상승률은 일제히 하락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가 4.9% 오른 인도는 생산자물가가 2.7% 하락했다. 싱가포르는 9.1%, 필리핀은 6.7% 하락했고 중국은 5.2%, 한국은 4.0% 내렸다. ADB는 일반적으로 생산자물가 상승률도 소비자물가 상승률만큼 중요하다며 위험성을 지적했다.

디플레이션 경고는 여러 국제 기관에서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5월 싱가포르가 4월 통화완화 정책을 실시한 것에 대해 “적절했다”라며 “싱가포르통화청(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 징후를 잘 감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책을 추가로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소비자물가는 2014년 11월 이후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보다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디플레이션 시작되면 경제에 치명적

그러나 디플레이션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의견도 있다. 수요가 감소해 발생한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공급이 많아져 생기는 디플레이션은 경제에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총요소생산성은 매년 6%씩 성장하고 있고 중국의 생산자들은 상품 가격을 인하하면서 동시에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의 생산성 향상에서 촉발된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은 과장됐다는 주장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이 인플레이션 위험 없이 고성장을 하는 ‘골디락스’ 시대를 누린 배경엔 중국발 저물가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디플레이션은 경제에 해롭다는 게 ADB의 의견이다. ADB는 보고서에서 “디플레이션은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만큼이나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랜 기간의 데이터가 이를 증명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보다 1.9% 올랐지만, 생산자물가지수는 2.6% 하락했다. 생산자물가지수는 4년 4개월째 연속 하락하고 있다. ADB는 이에 대해서도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인플레이션은 최근까지 디플레이션보다 훨씬 중요시돼 왔다”며 “중국 통화 당국자들은 소비자물가만큼이나 생산자물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디플레이션이 국경을 넘어 세계경제에 악재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최근 제기됐다. 알버트 에드워즈 소시에테제네랄 글로벌투자전략가는 “주요국 경제가 저성장·저물가 늪에 빠져들고 있고 많은 국가들이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자국 통화가치 절하를 필요로 한다”면서 “이런 가운데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위안화를 절하하면 중국 제품을 많이 수입하는 미국, 일본에선 인플레이션 압력이 작아진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사용하는 일본엔 중국의 ‘디플레이션 수출’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려는 정책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또 전통적으로 물가가 오르면 금리를 인상하고 물가가 하락하면 금리를 내리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은 금리 인상을 추진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에드워즈 전략가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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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deflation)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경제가 위축되는 현상.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올라가 경기가 과열되는 현상인 ‘인플레이션(Inflation)’과 반대다. 대부분의 디플레이션은 소비·투자 등 수요가 줄어서 발생한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기업이 상품 가격을 낮추고 수입이 줄어들면서 일자리도 감소한다. 또 앞으로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에 소비도 감소해 심각한 경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과 19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장기 저성장이 대표적이다.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증가한 생산량 중에서 노동과 자본 투입으로 늘어난 부분을 제외한 생산량을 말한다. 노동·자본·원자재 등 눈에 보이는 생산요소 외에 기술개발이나 경영혁신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부문의 생산량을 뜻하는 생산효율성 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