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3대(代)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대를 이어 재산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통하지 않는 말이다. 유럽에선 20대 이상 부유층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 적지 않다. 얼마 전 이탈리아 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들이 1427년과 2011년의 피렌체 납세 기록을 비교했다. 1427년의 주요 납세자 명단에 포함된 성씨 중 900개가 2011년 납세자 명단에도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원으로는 약 5만2000명이다.

연구자들은 피렌체의 고소득층 상당수가 600년 가까이 부(富)를 유지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탈리아의 성(姓)은 지역성이 강하기 때문에 성이 같으면 선조와 후손 관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실제 피렌체에선 600년 이상 최상류층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 적지 않다. 피렌체를 둘러싼 토스카나 지역의 와인 명가인 마르케시 프레스코발디 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레스코발디는 1308년에 창업해 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가족 기업이다.

14세기부터 영국 왕실 및 유럽 귀족들에게 와인을 공급해왔다.

와인 산업에 뛰어들기 전 양모 거래와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것까지 포함하면 가문의 역사가 1000년에 이른다. 프레스코발디 가문은 피렌체 은행을 경영하면서 13세기 말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프랑스와 벌인 전쟁 비용을 융자해주기도 했다.


피렌체 고소득층, 600년간 富 유지

피렌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수성가한 부자보다 상속 부자가 많은 게 유럽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미국에선 10억달러 이상 재산을 소유한 억만장자 중 상속 부자의 비중이 29%다. 유럽에선 이탈리아 37%, 스웨덴 63%, 독일 65%, 덴마크 83%, 핀란드 100% 등으로 그 비중이 훨씬 높다. 참고로 한국은 74%다. 미국 피터슨연구소의 연구 결과다. ‘부의 대물림’은 사회적 유동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계층 구조를 고착화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런데도 유럽에선 세습 부자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갈등이 별로 없는 편이다. 유럽 부자 가문들이 숱한 정치적 격변에도 수백년 동안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과 함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의 ‘푸게라이’를 보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 푸게라이는 16세기 유럽 최고 부자였던 야콥 푸거가 1521년에 세운 빈민을 위한 주거단지다.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 시설로 꼽힌다. 현재 푸게라이에는 1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연간 임대료는 500년 전과 똑같은 0.88유로다. 한국 돈 1000원으로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독일의 푸거 가문은 복지의 개념도 없던 시절에 유럽 사회복지의 초석을 놓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푸게라이는 지금도 야콥 푸거의 후손이 운영하고 있는 푸거재단 소유다. 푸거 은행을 비롯한 푸거 가문의 기업들은 이제 흔적도 없다. 그러나 푸거 가문은 재단을 통해 여전히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가문의 재산이 축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그 수익금으로 사회 공헌 활동을 하는 게 후손들의 주된 의무다. 프레스코발디 역시 피렌체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에 적극적이다. 수백년을 이어온 부자 가문은 부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다. 프레스코발디 그룹의 현 대표인 람베르토 프레스코발디는 “물려받은 재산은 내 소유가 아니다”며 “가업과 재산을 적절히 관리해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게 나의 가장 큰 임무”라고 했다. 푸거 가문의 후손 역시 자신은 일종의 ‘재산 신탁 관리인’이라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 의식과 함께 가문의 재산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받아들이는 가치관이 명문가의 전통이자 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