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진위를 확인하러 오면 가짜를 진짜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 : 피카소 공식사이트>
“이건 가짜요, 바이엘러씨.” 피카소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선생은 이 작품이 진품이라고 확인서까지 써주셨던데요.” 바이엘러는 피카소가 친필로 쓴 확인서를 내밀었다.
“아하, 생각나오. 그건 이 작품의 주인이 실물이 아닌 사진을 들고 와서 진위를 묻기에 내 작품이 맞다고 하고 써준 확인서요. 그 사람은 어여쁜 비서를 데리고 왔었소. 이해하겠소?”
“피카소 선생, 예쁨은 아름다움의 적입니다.”
“바이엘러씨, 예술은 그렇소만 여자는 다를 수 있소.”
피카소는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줄을 놓고 들이대는 병(?)이 있었다. 피카소가 불행하지 않았던 것은 여기에 대한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는 병을 더불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피카소는 그 작품을 찢어버리려고 했다. “잠깐만, 피카소 선생, 그 작품에는 큰돈이 걸려 있소.”
이렇게 해서 바이엘러는 피카소에게 ‘이 작품은 사진만 보고 진품인 줄 알았는데 실물을 보니 가짜다’라는 확인서를 받았다. 바이엘러는 원래 주인에게 그 작품을 반환하고 대금을 돌려받았다. 이 작품은 과슈(불투명수채)물감으로 그린 ‘화장 중인 소녀(Girl at her Toilet)’라는 가짜였다. 이 대화는 세계적인 화상 바이엘러(1921~2010년)의 자서전 격인 <에른스트 바이엘러, 예술을 향한 열정(Ernst Beyeler, A Passion for Art)>에 실린 것을 원본의 내용과 뜻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가 옮기고 덧붙인 것이다. ‘예쁨은 아름다움의 적이다’라는 말은 필자가 덧붙였다. 이 말은 원래 입체주의 화가 레제(Fernand Leger)가 한 것이다. 예쁜 것을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자는 생각은 인상파 시대 이후의 미술을 관통하는 사조가 됐다. 바이엘러도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엉터리투성이인 작가의 진위 판단
바이엘러는 작품의 진위 판단을 할 때 작가의 의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작품의 출처와 서류로 증명되는 거래내역을 가장 중시했다. 어느 날 그는 1912년에 그린 블라맹크(Vlaminck)의 작품 2점을 사서 다른 딜러에게 팔았다. 그 딜러는 혹시나 해서 이 두 그림을 블라맹크에게 보여줬다. 블라맹크는 대뜸 둘 다 가짜라고 했다. 한 점은 글라디올러스를 그린 그림인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꽃인데 내가 그걸 그렸겠느냐’고 화를 내면서 두 점의 캔버스 뒤에 주홍색의 크고 강렬한 획으로 ‘가짜(fake)’라고 휘갈겼다. 이내 손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바이엘러를 찾아와 따졌다. 그는 작품대금을 돌려주고 이 두 작품을 들고 칸바일러(Kahnweiler)를 찾았다. 블라맹크는 1914년까지 칸바일러 화랑의 전속이었다.
칸바일러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지독하게 꼼꼼했다. 그는 장부를 보여줬다. 거기에는 두 작품의 사진과 더불어 블라맹크로부터 직접 샀다는 기록이 있다. “어쩔 텐가. 블라멩크를 찾아가진 말게. 그는 너무 늙었네. 그냥 뒤에 새 캔버스를 덧대서 팔게. 내가 보증해주겠네”라는 칸바일러의 말을 뒤로하고 바이엘러는 씁쓸하게 발길을 돌렸다.
바이엘러는 작가가 주장하는 작품의 제작 연도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었다. 몬드리안(Mondrian)과 레제는 피카소의 영향을 부인하기 위해 또는 피카소보다 앞섰음을 내세우기 위해 작품의 제작 연도를 소급해서 적기도 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피카소를 앞선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예를 들면 몬드리안은 ‘유칼립투스(Eucalyptus)’라는 작품에 ‘P.M. 1910’이라 서명했지만 이 작품은 1912년에 완성한 것이다. 칸딘스키(Kandinsky)의 미망인인 니나(Nina Kandinsky)는 칸딘스키가 추상작품을 그린 최초의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910년에 그린 것으로 서명된 그의 수채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 1914년에 그렸으며 한참 후인 1936년에 서명하면서 제작 연도를 1910년으로 적어 넣은 것이다. 퐁피두센터에서 후에 이 작품의 제작 연도를 바로잡았다.

정직은 유명 화가의 덕목
바이엘러가 예로 든 위의 경우는 독창성(originality)을 중요시하는 예술세계에서 자기가 원조(origin)임을 내세우기 위해 제작시기를 앞당겨서 적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도 작가들은 제작시기에 대해 거짓으로 표기할 유혹을 받는다. 대부분 작가들의 작품은 나이가 들면서 변한다. 변화는 작가 내부의 충동에 기인하기도 하고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변화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시장은 변덕스러워 작가에게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실패는 작품의 인기와 가격의 하락을 가져오고 명성에도 치명적이다.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는 혁명적인 작품을 그리고 큐비즘의 기수가 된 피카소도 이런 갈등을 겪었다. 그의 변신이 보수적인 평론가 그룹이나 딜러 그리고 컬렉터들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13년 ‘곰의 가죽’ 경매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청색시대’나 ‘장미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력과 유혹이 더욱 거세졌다.
이후 그는 고전주의 화풍(신고전주의)으로 회귀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격적인 절충주의시대를 전개한다. 이런 변화로 아방가르드 그룹으로부터 변절이나 배신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1914년에 그리다 만 ‘화가와 모델’이란 작품은 그의 고민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고전주의 화풍으로 그린 이 작품은 큐비즘의 기수인 피카소가 공들여 쌓은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미완성의 이 작품을 끝내 공개하지 않고 죽었다.
피카소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가격이 초기작은 높고 말년으로 갈수록 떨어진다. 작가들은 초기작은 이미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 있는데(그것도 무명시절 싼값에) 고가에 거래되고 새로운 작품은 외면당하는 것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과거의 화풍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내세운 명분을 무효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옛날 화풍으로 그리고 작품 제작 연도도 그때로 적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이지만 들키지만 않는다면, 돈도 벌면서 세상의 비난도 면할 수 있다. 이우환 위작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바이엘러는 그의 자서전에 썼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다”라고.
▒ 김순응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경영학 석사,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 서울옥션 대표, 케이옥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