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중산층 인구 비율이 줄면서 대선을 앞두고 ‘중산층 위기’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중산층 인구는 줄었지만 소득은 늘어나 중산층 몰락을 주장하는 일부 대선후보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중산층 인구 비율이 감소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 대선의 두 후보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의 중산층 표심을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중산층 위기에 대한 논란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전체 인구 대비 중산층 비율은 1971년 61%에서 지난해 초 49.9%로 줄었다. 퓨리서치센터는 미국 총소득 중간값의 3분의 2에서 2배까지를 중산층으로 규정한다. 이 기준을 밑돌면 저소득층, 넘으면 고소득층으로 분류된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지난해 3인 가구 기준 소득액이 연 4만1900~12만5600달러(4750만원~ 1억4200만원)가 중산층에 속한다.
IMF, “중산층 줄어 소비 400조원 감소” 경고

미국 인구통계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소득 평균(중간값)은 5만6500달러로 5만3700달러였던 2014년보다 5.2% 늘었다. 5.2% 증가폭은 인구통계국이 1960년대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중산층 인구는 줄었지만 소득은 늘어난 것이다.
물가 상승이 미미한 가운데 고용이 안정되고 소득이 늘면서 같은 기간 빈곤층 가구 비율도 1.2%포인트(350만명) 감소했다. 1968년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월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미국인의 88%는 중상층 또는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 중산층 인구 감소에 지나친 경제적 의미 부여를 경계했다.
그렇게 보면 중산층 감소는 미국 경제의 위상 변화보다는 소득 불균형 확대와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두 대선후보들의 경제 관련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힐러리가 지난 8월 디트로이트에서 발표한 경제 정책의 핵심은 ‘중산층 살리기’였다. 그는 당시 스스로가 중산층 출신임을 강조하며 “소득 상위 계층엔 세금을 더 물리고, 중산층에 대해선 세액 공제 등으로 세금 부담을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트럼프도 얼마 전 2차 TV 토론에서 “중산층 세금을 포함해 세율을 낮출 것”이라고 공언했다.
특히 트럼프는 이민과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국제화를 ‘중산층 위기’의 본질적 원인으로 규정하고 반(反)이민, 반자유무역, 고립주의를 내세워 세를 규합했지만 중산층 소득이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머쓱해졌다.
트럼프의 경제 자문관인 스티븐 무어 헤리티지재단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마침내 중산층 가구 소득이 늘었다는 건 매우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여전히 15년 전에 비해 가난하며 이것이 트럼프 현상이 힘을 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국제화가 중산층 소득 감소의 이유라는 트럼프 주장도 역풍을 맞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공공정책 싱크탱크인 리즌재단(RF)은 지난 8월 보고서에서 미국이 9·11테러와 중동전쟁,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막대한 재정 지출을 감내하면서도 여전히 노동 시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이유는 “국제화에 따른 외국인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을 통해 상상할 수 없었던 정보 혁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미국의 소득 불평등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프랑스를 필두로 중산층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는 나라들도 있는 만큼 미국의 중산층 감소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와 관련해 최근 보고서에서 소득 양극화로 인한 중산층 인구 감소로 미국 전체적으로 소비가 연간 3%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4000억달러에 달한다. 중산층 일부가 저소득층으로 몰락하면서 소비 여력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미국 재무장관을 역임한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소비 3% 감소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임기 중 어느 해의 부양책 규모보다도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산층 감소 원인은 산업 자동화”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는 국제화가 미국 중산층 감소의 주범이라는 보수 정치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최근 FT와의 인터뷰에서 “(중산층 감소에) 국제화가 미친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미하다”며 “국제화가 (미국에) 가져다준 혜택이 큰 만큼 국제화에 대해 시비를 걸거나, 페이스를 늦추거나, 무역 장벽이나 (국경에) 담벼락을 쌓는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국제화로 빈곤자수가 크게 줄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난 30~40년 동안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 인구는 늘었지만 절대 빈곤 속에 생활하는 이들이 10억명이나 줄었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위기를 부추기는 더 중요한 이유로는 ‘자동화(automation)’를 꼽았다. 미국 제조업은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노동자수는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디턴 교수는 이에 대해 “중국이나 인도, 베트남 노동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로봇의 등장 등 기술 발달 때문에 그렇게 됐다”며 “국제화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수백만명에게 전에 없던 큰 피해가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디턴 교수는 선진국과 빈곤 국가의 경제 발전과 빈곤 문제에 대한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