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식열전’의 자매편이라 일컬어지는 사기 ‘평준서’는 한무제(漢武帝) 시기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경제정책을 전면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하는 진보적 경제사상을 담고 있다.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폐해로 한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변화(쇠퇴)해 갔는가를 생동감 넘치게 전달한다.
사마천은 ‘평준서’에서 한무제의 영토확장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경제 파탄의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한무제는 국가재정을 늘리기 위해 소금·철·술 등의 전매정책을 내세웠다. 사마천의 입장에서 보면 한무제의 전매정책은 가장 나쁜 정치형태인 ‘재산을 가지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국가의 매점매석 행위 우회적 비판
한무제가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이전 한나라의 경제는 매우 융성했다. 국가 창고에 곡식이 넘쳐 길가에 쌓아 놓은 곡식들이 썩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흉노의 정벌과 대규모 토목사업 그리고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로 국가재정이 쪼들리게 되자 세금을 늘리고 염철을 국유화해 세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특히 곡물가격이 쌀 때 국가가 대량 매수했다가 가격이 오를 때 비싸게 내다 파는 ‘평준법’ 시행이 문제가 됐다. 평준법은 국가의 매점매석 행위를 정당화하는 시책이라 할 수 있다. 평준법과 염철의 국가운영은 모두 낙양의 상인 출신인 상홍양(桑弘羊)이 입안한 것이다. 상홍양의 시책으로 한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업의 억제와 증세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시장의 기능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대농(大農)에 속한 모든 관리들은 천하의 물자를 모두 관장하여 값이 오르면 팔고, 값이 떨어지면 사들이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부유한 대상인들이 크게 이익을 취할 수 없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농업 생산으로 돌아가게 되며, 각종 물자도 등귀하는 일이 없어진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물가가 억제되는 것을 ‘평준(平準)’이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평준서’
국가와 결부된 대농들이 물가 억제라는 미명하에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평준’의 본령이다. 이른바 정경유착이다. 상홍양은 “모든 관청에서 나름대로 스스로 사고팔면서 서로 경쟁을 했으므로 물가가 이 때문에 뛰어올랐고, 천하에서 조세를 운송하는데 어떤 경우는 그 운송비도 충당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로 평준법의 시행을 황제에게 제안한다. 자유경쟁이 가격을 상승시켰고 그로 인해 조세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상홍양의 진단이다.
그에 대한 처방으로 내려진 것이 매점매석을 통해 시장을 교란시켜 상인들의 이익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평준법을 시행한 지 1년 만에 한나라의 조정 창고인 태창과 감천창은 곡물로 가득 찼다. 그 공로로 상홍양은 좌서장(左庶長) 작위를 하사받았고 황금을 두 번에 걸쳐 100근씩 받았다. 사마천은 상홍양의 억상(抑商)정책에 대해 복식(卜式)이라는 인물이 황제에게 진언한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때마침 나라에 가뭄이 있어 황제가 기우제를 지내게 했는데, 이때 복식이 “조정은 조세만으로 입을 것과 먹는 것을 충당해야 할 뿐인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들로 하여금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 앉게 하고는 물건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상홍양을 삶아 죽인다면 하늘은 비를 내릴 것입니다”라고 진언한다. 복식의 말은 ‘평준서’ 마지막에 나온다. 사마천이 ‘평준서’의 마지막을 복식의 말로 끝맺은 이유는 바로 상홍양의 정책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기는 했지만 관리들이 시장을 교란시켜 이익을 챙기는 폐단을 낳았고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황폐해졌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상홍양의 시책은 사마천이 가장 저급한 정치 형태로 지목했던 국가가 부를 가지고 백성과 다투는 ‘여지쟁(與之爭)’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국가 부유해졌지만 백성 삶은 황폐해져
사마천은 ‘평준서’에서 “사물이 극성하면 쇠락하고 시대도 극점에 이르면 전환하니, 한 번은 질박한 시대, 한 번은 화려한 시대가 번갈아 나타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다”고 했다. 꾸밈없이 수수한 ‘질박한 시대’와 사치와 교만이 분수를 넘는 ‘화려한 시대’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변화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질박한 시대에는 국가의 간섭이 필요 없다. 그러나 화려한 시대에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본성이 극에 달하면 사치와 교만으로 변한다. 이익을 이용해 백성을 다스리는 ‘이도(利道)’의 통치도 어느 순간 쇠락하기 마련이라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다. 그래서 교화를 통해 백성을 깨우치는 ‘교회(敎誨)’와 법과 제도를 통해 백성을 바로 잡는 ‘정제(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적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원칙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탄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적 입장에서 한걸음 더 나가 수정자본주의 경제이론의 비조인 케인스적 시각까지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가 일정 정도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유경쟁의 원리까지 침범해 시장을 교란시키는 ‘여지쟁’의 행태는 용납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국가의 역할이란 국민들의 의식주와 관계된 물품들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물자를 고르게 유통시켜 시장의 활성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봤다. 우리 헌법은 경제 질서의 기본원리로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자유경쟁이 초래할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의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이때 국가의 관여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보충적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특히 국가가 민간기업의 경영에 간섭하거나 경영을 통제하려면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헌법 제126조)하고 있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시장경제적 법치주의를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헌법에도 사마천의 경제이념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운 부분이다. 물건과 돈을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라는 사마천의 주장은 정치 포퓰리즘으로 경제논리를 왜곡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소중한 귀감이 되고 있다.
▒ 이석연
전북대 법학과, 서울대 법학 박사, 현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 대표,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