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도 없는 졸부로 여기던 대서양 건너 미국과 동쪽 변방으로 취급받던 소련이 제2차세계대전 후에 개막된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됐다. 수백년간 헤게모니를 휘둘러 온 전통의 유럽 열강들은 마치 순식간에 몰락한 양반처럼 자의반타의반으로 냉전체제에 편입돼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불쌍한 처지로 바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후 복구가 완료된 1960년대가 되자 유럽은 과거의 위상 찾기에 나섰다. 이때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선두에 섰던 나라가 프랑스였다. 1956년 수에즈 사태 당시에 소련이 핵폭탄 공격 위협을 가했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하던 미국이 수수방관하자 프랑스는 격분했다. 이에 프랑스는 핵폭탄 개발을 선언했고 결국 1960년 핵클럽의 일원이 됐다. 1966년에는 미국 주도의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했을 만큼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처럼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은 정치, 군사적으로 서서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미 다른 길을 가던 중이었다. 1951년 프랑스는 과감하게 패전국 서독과 힘을 합쳐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주도했고, 이는 오늘날 EU(유럽연합)로 발전했다.
에어버스에 손 내민 대한항공
이처럼 유럽, 특히 프랑스는 전후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미국이 한참 앞서 가고 있던 항공 산업도 그러한 분야 중 하나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은 항공 산업을 선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만고만한 회사들과 자국의 작은 시장만으로는 미국의 항공기 제작업체와 경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1960년대 들어 공멸의 위기에 처한 유럽 항공기 제조사들은 상호협조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참여한 기업들의 이해타산이 충돌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1967년 성립된 컨소시엄을 바탕으로 1970년 탄생한 에어버스(Airbus)는 오늘날 미국의 보잉(Boeing)과 더불어 세계 민항기 시장을 반분하는 거인이 됐다. 민항기 시장의 전통 강자인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가 1997년 라이벌 보잉에 합병되는 혼란기에서도 살아남았을 만큼 현재 에어버스는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몇 안 되는 유럽의 항공기 제조업체다.
그렇다고 에어버스가 처음부터 성공 신화를 쓴 것은 아니었다. 에어버스가 처음 만든 항공기는 A300이다. A300은 1972년 첫 비행에 나서며 미국의 B727, DC-10, L-1011이 석권하고 있는 중장거리 민항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에어버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유럽 국가들 외에는 이 항공기를 구매하는 국가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때만 해도 에어버스는 세계시장에 명함을 내놓기 어려운 후발 주자였던 것이다.
에어버스 탄생을 주도하고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고민은 깊어졌다. 더구나 제1차오일쇼크가 벌어져 에어버스가 제대로 하늘에 떠보지도 못하고 좌초한다면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 확실했다. 이때 에어버스가 회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곳이 바로 대한항공이다. 당시 항공 시장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항공은 A300 4대를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1974년 4기의 A300이 사상 최초로 에어버스 제작 관련국 이외의 국가에 수출됐다. 이를 시작으로 A300은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198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동체의 폭이 넓은 쌍발 광동체 민항기의 표준이 됐다.

엑조세 도입에 놀란 미국, 하푼 판매 승인
이후 대한항공은 에어버스의 중요한 고객으로 자리 잡게 되지만 사실 최초 도입 물량이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길을 열어준 대한항공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은 각별했고, 프랑스는 국가 원수를 제외한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조중훈 당시 대한항공 회장에게 수여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 거래는 한국과 프랑스 양측의 이해타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성사될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주한 미 7사단의 철수와 동남아 공산화로 위기를 느낀 한국 정부는 북한 해군을 제압할 대함미사일의 도입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하푼(Harpoon) 대함미사일이 자국 소요 물량을 대기도 벅차다는 핑계로 미국이 판매를 거부하자, 전격적으로 프랑스의 엑조세(Exocet) 대함미사일 도입으로 정책을 바꿨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는 이제 막 양산에 들어간 최신 무기의 판매를 망설였다.
바로 이때 우리 정부가 대한항공을 내세워 A300을 함께 구매하겠다는 당근을 제시했고 이는 프랑스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프랑스와 거의 비슷한 1975년 엑조세 대함미사일을 실전에 배치할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의 하푼 판매 거부는 당시 일본이 가지지 못한 공격 무기를 한국이 먼저 보유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의 방해 로비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도입선을 과감히 다른 곳으로 돌린 정부의 적극적인 행동에 놀란 미국은 엑조세를 도입한 직후에 곧바로 하푼의 판매를 승인했고, 덕분에 우리나라는 엑조세는 물론 일본보다 먼저 하푼을 보유하게 됐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칼자루를 잡고 무기 시장을 흔들었던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기뿐 아니라 일반 상거래에서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근무, 무역 대행업체인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로 활동, 주요 저서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