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美術)은 왜 어려워지는가’ ‘미술은 왜 끊임없이 변하는가’ ‘미술은 왜 추술(醜術)이 돼 가는가’ ‘미술은 왜 갈수록 난해해지는가’ ‘도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실용을 배제한 대부분의 순수예술 장르에 해당한다. 음악도 문학도 아름다움과 상식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난해해진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점차 예술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거나 심지어는 적대적으로까지 돼 버린다. 미술은 아름다움(美)을 표현하는 기술(術)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개인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미술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 기술의 발명,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서도 변천해왔다. 예술가들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이다. ‘무엇’이 변하고 ‘어떻게’가 변하면서 미술은 숙명적으로 복잡다기해질 수밖에 없다.
미켈란젤로, 후원자 그림 70여년 그려
근대에 접어들어 미술의 대상은 아름다움을 넘어서게 된다. 교권과 왕권이 몰락하면서 화가들은 후원자(patron)를 잃었다. 이들은 화가들을 고용해 예배당이나 성에 장식물을 만들게 했었다. 장식물은 철저하게 후원자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의 지시는 사물의 재현과 미화에 기반을 둔 주술적·장식적 요구였다. 후원은 굴종을 요구했으며 후원자는 보스(boss)였다. 미켈란젤로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과 교황들(90세까지 장수한 미켈란젤로는 7명의 교황을 모셨다)은 그의 창작과 관련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는데,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 장식 조각으로 40년을 시달린 그는 이를 ‘무덤의 비극’이라고 불렀다. 자유의지가 배제된 창작물은 예술이 아니다.
주문이 끊긴 예술가들은 시장으로 나서야 했다. 시장에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들이 원하는 미술은 종전의 것과 달랐다. 그들은 삶과 밀착된 그림을 원했다. 그들에게는 장식해야 할 교회도 궁전도 저택도 무덤도 없었다. 벽화나 천장화나 제단화나 대리석 조각이 아니라 집 안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는 작은 그림이 필요했다. 그림은 거래하기 쉽게 규격화돼 호수(號數)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전설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원했다. 가식이 아닌 진실(truth)을 원했다. 이는 자유의지를 얻고 자의식과 존엄을 갖추기 시작한 화가들의 열망과도 맞아떨어졌다. 이제야 비로소 예술이 시작됐다. 화가들은 가짜가 아닌 진짜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움도 진실 안에서의 아름다움이어야 했다.
주객이 바뀌어 예술가는 관객에게 예술을 이해할 것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관객을 조롱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즘이나 상류층에서는 금기시한 빈민층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회화란 근본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천사를 보여준다면 그려 보겠다”고 답했다. 그가 그린 ‘세상의 기원’은 너무 리얼해서 100년이 지난 1988년에야 공개됐다. 장 프랑수아 밀레는 하찮은 농부들을 숭고하게 그려 농민화가라 불렸으며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쿠르베나 밀레는 있는 그대로의 일상에 진실이 있다고 믿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야외로 나간 것은 바르비종파 때부터였다. 이들을 위해 튜브물감이 만들어졌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 예술관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은 진실은 찰나에 있다고 생각하고 색채와 빛으로 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클로드 모네는 “이곳을 나가자. 여기는 유해한 곳이다”고 외치며 화실을 뛰쳐나갔다. 에두아르 마네는 “내 싸움 상대는 아카데미이고 그들의 살롱이 내 전쟁터”라고 선언했다. 인상주의는 르네상스시대 이래 미술을 지배한 규범인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법 등을 깬 최초의 총체적 미술혁신이 됐다.

인상주의 화가, 개성 담은 예술 펼쳐
인상주의 혁명은 뒤따르는 화가들을 전통의 감옥에서 해방시켰다. 이제 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진실은 시대적이고 보편적이기 전에 개별적이며 개별적일수록 더 절실하다. 개별적 진실은 사람 숫자만큼 많다.
이제 예술이 예술가의 숫자만큼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다원주의 예술 시대가 열렸다.
반 고흐에게 진실은 자신의 감정에 있었다. 그는 “인간들이여, 사랑하는 것을 사랑합시다. 자기 자신이 됩시다. 마치 신보다 더 잘 아는 듯 행동하지 맙시다”고 외쳤다. 그는 친구 화가인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가 가진 최고의 능력을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데에 쏟아붓는 반면, 정작 자신한테 소중한 것은 계모처럼 학대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닐세. 심지어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를 ‘의연한 성품’이라거나 ‘강한 정신력’으로까지 믿고 있지. 그러면서 가슴에 복받치는 정열에 솔직히 빠져드는 대신, 가치 없는 것에 힘을 쏟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시해 버리네”라고 썼다. 고흐는 ‘눈에 박힌 괴물만한 대들보들’이라고 표현한 기존의 가치 체계에 눈이 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의 표현을 옮기면 ‘예술적·신학적·도덕적 대들보들, 경험적·이론적 대들보들’이었다. 그는 매일 유행이나 유파(流派)에 개의치 않고 고집스럽게 내 길을 걸어가리라고 다짐했다. 그에게는 에고(ego․자아)가 진실이었다.
광적 터치와 색채 운용, 형태 왜곡은 그의 고뇌를 담기 위한 최적의 그릇이었다. 그는 “일부러 부정확하게 그려 나의 비사실적인 그림이 사실을 그린 그림보다 더욱 진실되게 보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고흐는 자기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그의 고뇌는 현대인의 고뇌로 승화되고 그의 개별적 진실은 시대적 진실, 보편적 진실이 돼 그는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됐다.
▒ 김순응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경영학 석사,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 서울옥션 대표, 케이옥션 대표
아카데미즘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학풍,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말한다. 새로운 양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져 형식적인 전통으로 고착화되면 이를 비판적인 의미로 아카데미즘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