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은 시민군이 아닌 용병에서 진화한 자신의 군단을 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한니발은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겨우 2만의 군대로 15년 이상 이탈리아를 제 집처럼 횡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 어떤 로마 장군도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한니발은 시민군이 아닌 용병에서 진화한 자신의 군단을 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한니발은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겨우 2만의 군대로 15년 이상 이탈리아를 제 집처럼 횡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 어떤 로마 장군도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1204년 4월 12일, 십자군의 전사들은 기진맥진한 채 괴물 같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성벽 앞에 서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감싸고 있는 성벽은 건축 이래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거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오후, 프랑스의 아미앵에서 온 피에르라는 기사가 이끄는 60여명의 소부대가 우연히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는 데 성공했다. 뚫었다기보다는 무너진 곳을 발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에는 무장 병력이 우글우글했다. 이때 알림이라는 무장 사제가 구멍으로 들어가 돌진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는 영예에 매료돼 죽음도 불사할 각오였다. 알림은 성호를 긋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백명이 넘는 수비대가 알림을 보자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동료들이 따라서 들어갔다. 그들의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성문이 놓여 있었다. 그들이 빗장을 열자 십자군이 몰려들었다. 그날 콘스탄티노플은 난생 처음으로 함락됐다.

이 어이없는 사건의 주범은 비잔틴 제국의 용병제도였다. 부유한 비잔틴 시민들은 군복무를 싫어했고 돈으로 용병을 고용해 수비를 맡겼다. 용병은 약자와 이기는 전쟁에서는 그럭저럭 제몫을 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면 무용지물이었다. 보수는 다시 취직하면 얻을 수 있지만 생명은 잃으면 끝장이었다.


용병은 싸우지 않는다?

용병으로 인해 벌어진 황당한 사례는 전쟁사에 널려 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전쟁터는 용병으로 가득했는데, 마키아벨리는 그들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척만 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않는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승부를 내서 전투가 끝나면 그들의 일자리도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싸울 이유가 돈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 제대로 싸우지 않는 용병제도를 극도로 혐오했던 마키아벨리는 용병 대신 오늘날 같은 징병제도를 통한 시민군 창설을 주장했다.

용병 때문에 마키아벨리만큼이나 분노했을 장군이 있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방어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이다.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붙은 포에니 전쟁에서 최초의 대결장은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세력을 로마가 몰아내려고 한 것이 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로마군은 시민정신이 투철하고 이탈리아 정복 전쟁 과정에서 탁월한 전술과 전투능력까지 확보한 시민군단이었다. 반면 카르타고군은 용병 의존도가 너무 높아 시민군은 아예 찾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 용병들의 행태 역시 콘스탄티노플 수비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카르타고의 시민정신과 용병의 생리를 비난하고 한탄할 것이다.

젊은 장군이었던 하밀카르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에게 있는 병사는 용병뿐이다. 그들로 시민군을 상대할 수 없고 시민군도 양성할 수 없다면 용병부대를 전투력과 전투의지가 충만한 부대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하밀카르는 용병들을 이끌고 험악한 에트나 산지로 들어갔다.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하밀카르는 자신의 부대에 두 가지를 부여하려고 애썼다. 소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전투경험과 전투능력을 학습시키고 이 과정을 통해 부대원 간의 연대의식을 키웠다. 그는 시민군에게 전투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시민의식이라면 용병에게는 연대감과 동료애, 생존의지를 통해 전투의지를 배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전투의지만으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기업으로 치면 위기의식과 생존의지는 공동의 의식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의지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창의와 그 목표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유발할 수는 없다.

하밀카르는 이 마지막 퍼즐을 풀 열쇠를 찾아냈다. 리더십이었다. 새로운 리더십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시민군대는 시민의식으로 뭉치지만 그렇기 때문에 리더십도 시민의식에 제한된다. 리더는 시민들이 익숙한, 그들이 선호하는 가치를 넘어선 목표를 제시하기 어렵다. 반면 용병은 알고 보면 외로운 존재다. 리더십과 동료의식으로 무한정 뭉칠 수 있다. 대신 리더가 그들로부터 확고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런 신뢰를 얻는다면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고 모험적인 목표라도 따라올 것이다.

하밀카르의 착상을 현실로 증명한 사람이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이었다. 한니발은 시민군이 아닌 용병에서 진화한 자신의 군단을 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가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본국에서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겨우 2만의 군대로 15년 이상 이탈리아를 제 집처럼 횡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 어떤 로마의 장군도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니발 군대에서 단 한명의 탈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까지 세웠다. 이런 놀라운 단결력과 용기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한니발은 전에 없던 노력을 했다. 병사들과 같이 뒹굴고 먹고 자고 전투에서는 언제나 누구보다 뛰어난 용기와 탁월한 판단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유형의 ‘직업군인’ 창안

이런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처음 등장한 리더십이었다. 현대의 지휘관도 곧잘 써먹는 “적진에는 내가 맨 앞에서 들어가고, 적진에서 나올 때는 제일 늦게 나올 것이다”라는 행동도 한니발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때까지 로마의 장군은 귀족명문가 출신이면서 군인으로서의 미덕보다는 인간적인 미덕, 지위, 교양으로 존경을 받았다. 즉 그는 유전자로나 재산과 지식으로나 우월한 시민이었다. 하밀카르와 한니발은 새로운 리더상을 찾아냈다. 완전한 군인, 완벽한 군사 지도자였다.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4차원적 진화를 한다고 한다. SK와 일본의 이토추는 석유화학 사업을 하다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거의 투기적인 변신으로 지탄받았지만, 애플이 전기자동차에 뛰어드는 작금의 기준으로 보면 놀랍지도 않다. 이런 변신이 강요되는 세상에서 기술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사람의 변화다. IT 인력이 자동차 개발자로 변신하듯이 절대적으로 넘을 수 없다고 보이던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있다. 이 변화과정에서 조직의 구성원이 변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거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하밀카르가 직면했던 과제와 유사하다. 하밀카르는 용병부대를 시민군단으로 변신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버리고, 직업군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군대를 창안했다. 그에 맞춰 자신의 리더십도 새로이 개발했다. 그의 업적을 제대로 계승한 국가는 본국 카르타고가 아니라 적국 로마였다.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로 이어지는 로마의 명장들은 한니발에게서 배운 새로운 리더십과 직업전사 모델을 수용해 무적의 로마군단을 새롭게 만들어냈고 이들을 이용해 로마 제국을 건설했다.


▒ 임용한
연세대 사학과 석사,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등에서 한국사, 군제사 강사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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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Hannibal) 카르타고의 정치가·장군.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을 일으켜 육로로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공격하자 고국에 소환돼 자마 전투에서 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