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 해 동안 세계 경제계의 거물이 경제정책을 놓고 공개적으로 맞붙는 희귀한 ‘빅 이벤트’가 속속 벌어졌습니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과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블로그를 통해 설전을 벌였고,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학 교수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서로를 거명하며 비난했죠. 이들의 ‘경제학 전쟁’은 역설적으로 세계 경제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고 2010년 유럽 재정 위기가 일어나면서 세계경제는 8년째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요 선진국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제로 금리에 양적 완화, 재정 확대 정책 등 경제정책을 동원했지만,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경제가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그동안의 정책이 옳았는지, 앞으로 어떤 정책을 써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나라의 입장, 그리고 각국의 정책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경제학자들이 각자의 견해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 경제학 대전의 진영은 정부 개입 강도에 따라 △모든 정책을 동원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 △재정정책을 강조해 경기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 △통화정책은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은 긴축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 △통화정책을 적절하게 하면서, 재정정책을 긴축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 등으로 나뉩니다.
크루그먼, 재정·통화정책 망라한 ‘총력전’ 주장
폴 크루그먼의 재정·통화정책 총력전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약 70여년 만에 나타난 최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리를 내려 돈을 푸는 통화정책, 정부가 재정을 푸는 재정정책 등 경제정책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버냉키 전 의장을 비롯해 그 후임인 재닛 옐런 현 연준 의장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죠.
크루그먼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약 2%)에 도달할 때까지 기준금리를 인상해서는 안 되며, 재정 적자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정부 지출을 늘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학문적 배경을 보면, ‘신(新)케인스주의’에 가깝습니다. 신케인스주의는 재정정책을 중요시한 케인스주의의 주장을 좀 더 장기적인 경제 현실에 맞게 발전시킨 이론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이 ‘재정 긴축론’입니다. 국가 부채 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90%를 넘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재정정책은 긴축적으로, 통화정책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유럽 재정 위기가 한창이던 2010년 4월,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는 ‘부채 시대의 성장’이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40여개국의 200년에 걸친 방대한 통계를 분석한 논문의 결론은 GDP 대비 부채 비율이 90%를 넘는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0.1%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 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성장이 뒷걸음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로고프-라인하트 절벽’이라고 했습니다.
로고프와 라인하트의 논문은 MIT 경제학과 박사과정 학생 등의 반박 논문으로 일부 오류가 발견됐고 타당성 논란이 있었지만 재정 위기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큰 시사점을 던졌습니다. 이들은 국가 부채가 증가하면 금리가 상승하고 따라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재정 긴축이 필요하며 특히 단기 부채 감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죠.
대표적인 성장파인 폴 크루그먼과 정반대인 셈입니다. 크루그먼은 국가 부채가 증가한 원인은 근본적으로 경기 침체와 저성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정 긴축은 침체를 더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유럽이 재정위기에 빠지면서 일부 국가의 방만한 재정이 문제가 되자 크루그먼의 주장에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격렬한 반대자가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이었습니다. 그는 재정 긴축론을 주장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몇 년 동안 공개적인 논쟁을 이어왔는데, 이 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것이 2015년 5월에 열린 영국 총선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퍼거슨, 긴축정책 반대한 학자들 비판
영국 보수당 정부의 입장은 퍼거슨의 입장과 비슷했습니다. 보수당은 그동안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을 펼쳐왔고, 긴축정책이 옳았는지는 영국 선거 쟁점 중의 하나였는데, 백중일 것 같았던 선거는 의외로 보수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크루그먼은 2015년 5월 8일 뉴욕타임스에 ‘생각 없는 사람들의 승리’란 칼럼을 써 선거 결과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긴축 덕분에 영국이 살아났다는 것은 보수당이 퍼뜨린 잘못된 사실”이라며 “영국은 긴축정책을 써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비율 모두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금융위기로 잠시 높아졌을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퍼거슨 역시 이틀 후인 10일에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칼럼을 기고해 크루그먼을 공개 비판했습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긴축정책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버냉키와 서머스, 퍼거슨과 크루그먼의 논쟁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나야 그 승패가 갈릴 전망입니다. 물론, 승자가 누구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경제가 8년 이상 계속되는 금융위기의 여파를 떨치고 나오는 것일 겁니다.
▒ 니얼 퍼거슨 Niall Ferguson
미국 하버드대 교수
▒ 폴 크루그먼 Paul Krugman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