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노심용융 은폐 사실이 최근 공개돼 도쿄전력이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2013년 9월 19일 아베 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오코 아키로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소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노심용융 은폐 사실이 최근 공개돼 도쿄전력이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2013년 9월 19일 아베 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오코 아키로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소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도덴(東電·도쿄전력)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한때 아시아 최고, 세계 4위 전력회사였던 도쿄전력(TEPCO)이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후쿠시마(福島) 원자력 발전소의 노심용융(melt-down) 은폐 사실이 최근 공개된 데 이어 10월에는 ‘일본의 심장’ 도쿄를 암흑으로 몰고간 초대형 블랙아웃(blackout·대규모 정전) 사고를 내는 등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멈춰선 원전들은 언제 가동될지 기약이 없는데 전력시장 개방으로 통신·가스회사들이 앞다퉈 전력시장에 진출하고 있어 실적 개선은 요원하다. 주가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가 일본 정부의 추가 공적자금을 구걸하고 있다.


35년간 보수 안해 도쿄 58만가구 블랙아웃

10월 12일 오후 2시50분쯤 사이타마현(埼玉県)니이자시(新座市) 지하송전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 도쿄도(東京都) 58만가구가 일제히 정전됐다. 지하에서 솟구치는 검은 연기가 도쿄 상공을 까맣게 덮었고 신호등이 꺼지면서 자동차 수백만대가 우왕좌왕했다. 멈춰선 지하철과 엘리베이터에 갇힌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몸을 떨었다.

원인은 송전 시설 노후화로 인한 누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설치 이후 35년간 단 한 번도 시설보수나 부품교환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일본 국민들을 또 한번 충격에 빠뜨렸다. 도쿄도 중심지역인 미나토구(港区), 신주쿠구(新宿区)등 11개구에 대한 전력 공급이 10분 만에 재개됐고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원전 사고와 사고 은폐로 가뜩이나 ‘안전신화’를 망가뜨린 ‘악당’이 된 도쿄전력 이미지는 다시 한번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쿄전력 주가는 바닥을 기고 있다. 지난해 동기 대비 반 토막이 났다. 10월 17일엔 하루 만에 8%가량 폭락했다. 전날 치러진 니가타현(新潟県)지사 선거에서 야당 성향인 요네야마 류이치(米山隆一) 후보가 당선됐다는 소식이 직격탄이었다. 요네야마 류이치는 도쿄전력의 원전 재가동에 비판적인 인사다. 도쿄전력의 생사가 달린 원전 재가동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평가다.

전력시장 개방도 도쿄전력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역 독점 체제의 폐해를 없애겠다며 올해 4월 전력판매 시장을 전면 자율화했다.1951년 이후 5개 전력회사들이 일본 전역을 분할, 독점적으로 전기를 팔던 체제가 깨졌다.

전력 독점이 깨지자 기회를 엿보던 회사들, 특히 가스회사들과 통신사들이 대거 진출했다.

도쿄가스는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올해 안으로 4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당초 목표를 53만가구로 높여 잡았다. 이바라기현(茨城県)히타치 LNG시설 주변에 독자 발전소를 건설, 전력을 자체 조달할 계획이다. 도쿄가스는 2020년 전력 매출이 1000억엔(1조1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연간 20만가구 전력 공급을 목표로 세운 오사카가스는 사업 시작 3개월 만에 17만가구와 계약했다. 통신회사 KDDI, 케이블TV 주피터텔레콤(J:COM)도 저렴한 전기요금을 내걸고 전력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도쿄도 등 일본 핵심 지역의 전력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던 도쿄전력엔 우울한 소식이다. 도쿄전력은 소프트뱅크와 제휴, 전력 사용량이 적은 가구에 대한 추가 할인, 전력·가스 결합 판매를 내걸고 고객 지키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히로세 나오미 도쿄전력 사장(왼쪽)이 나이토 요시히로 부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히로세 나오미 도쿄전력 사장(왼쪽)이 나이토 요시히로 부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팔방이 막혀 운명의 날 임박”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악몽은 계속되고 있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당시 노심용융(멜트다운)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을 지난 6월 인정했다. 사고 5년 만이다. 도쿄전력 제3자 검증위원회가 ‘노심용융 은폐 의혹 조사 보고서’를 통해 대지진 사흘 뒤인 2011년 3월 14일, 시미즈 마사타카(淸水正孝) 당시 도쿄전력 사장이 기자회견 중인 부사장에게 “총리 관저의 지시”라며 “이 단어(노심용융)는 절대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히로세 나오미(廣瀨直己) 도쿄전력 사장은 “(멜트다운을 거론하지 말라는) 입막음에 해당하는 듯한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통한의 극치”라며 “(일본) 사회가 ‘은폐’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며 거푸 고개를 숙였다.

원전 사고 후유증은 경영진 사과로 끝날 기미가 아니다. ‘슈칸분슌(週刊文春)’은 최근 “(일본) 경제산업성 내부 자료에 따르면 도쿄전력이 감당해야 할 원전사고 배상 비용은 12조엔(132조원), 원자로 폐로 비용은 6조엔(66조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도쿄전력의 순자산은 2조2000억엔(24조20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회사채 발행도 꽉 막혀 있다. 히로세 나오미 사장은 “자본 잠식 위기”라며 정부에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도쿄전력을 후쿠시마 제1원전을 담당하는 ‘나쁜 도쿄전력(Bad TEPCO)’과 ‘가시와자키카리와’ 발전소 등을 담당하는 ‘좋은 도쿄전력(Good TEPCO)’으로 분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전력회사들이 도쿄전력과의 연계에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분사도 쉽지 않다. “팔방이 막힌 도쿄전력의 ‘X-Day(운명의 날)’가 다가오고 있다”고 <슈칸분슌>은 보도했다.


Plus Point

정경유착·부실경영 대명사

‘도덴(東電)’또는 TEPCO로 불리는 도쿄전력은 1951년 전후 일본 경제 부흥을 목표로 출범한 민간 전력회사다. 사이타마·이바라기·지바·가나가와·군마·시즈오카현 등 도쿄도와 주변 지역 전력을 독점 공급해왔으며 올 4월 전력 판매 자율화 조치 이후 도쿄전력홀딩스주식회사로 개명했다. 본사는 도쿄도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쵸에 있다.

2015년 3월 기준 자본금 1조4009억엔(15조4000억원), 매출은 6조8000억엔(74조8000억원)이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배상과 복구를 위해 일본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현재 원자력 지원기구가 주식 54.69%를 가진 최대주주다.

1975년부터 2002년까지 20여년간 원전에서 일어난 안전사고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허위 보고서를 제출한 혐의가 드러나 사장 등 경영진 5명이 해고됐다. 경제산업성 등 정부 출신 낙하산 인사가 68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등 정경유착·부실경영의 대명사가 됐다. 1993년 이후 매년 4000억배럴의 방사능 폐기물을 동해에 투기한 사실도 시인했다. 2011년 원전 사고로 ‘2012년 세계 최악의 기업’ 최종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