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스의 고향 영국 리버풀은 한때 런던보다 막강한 부와 명성을 자랑했던 항구도시다. 1800년대에는 세계 물동량의 절반이 리버풀 항구를 거쳤을 만큼 거대한 무역항이었고 오랜 기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항해의 중심지였다. 비틀스 음악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주인공 주드가 미국으로 출항한 곳도,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공식항구도 이 리버풀 항구였다. 부두에는 비틀스 스토리, 테이트 리버풀, 머시사이드 해양박물관 등의 명소가 있는 복합건물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어 관광객이 1년에 400만명 넘게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도시의 최고 히트작은 비틀스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Liverpool John Lennon Airport),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클럽 더 캐번, 스트로베리 필드, 애비 로드 스튜디오 등 도시 전체가 비틀스 테마파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65일 무대 서는 혹독한 트레이닝 거쳐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스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한다. 62년 싱글 ‘러브 미 두(love me do)’로 데뷔한 후 1970년 해체할 때까지 13장의 정규앨범을 내면서 비틀스는 생각보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활동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음악뿐 아니라 미술·문학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도 이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나오고 태양의 서커스 ‘러브’도 비틀스에서 창작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니,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을 비틀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비틀스가 왜 ‘Beatles’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많을까. 존 레논은 기자들에게 어느 날 천사가 꿈에 나타나 Beatles라고 하라고 했다는데 물론 농담일 테고. 비틀스는 무명시절에 쿼리멘, 레인보우 등 많은 이름을 거쳐 Beetles(딱정벌레)로 정착했다. 그 당시 인기 록 그룹 버디 홀리 앤드 더 크리켓츠의 crickets(귀뚜라미)에서 딱정벌레로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모양이다. 이 딱정벌레의 ‘Beet’는 음악적인 뉘앙스 즉 리듬과 박자의 느낌을 살려서 ‘Beat’로 바꿨다. 여기서부터 벌써 비틀스는 될 성 싶은 음악 꿈나무로 보인다. 비틀스를 오늘날의 비틀스로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고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Henry Martin)이다. 엡스타인은 먼저 이들이 입고 있는 가죽재킷을 말쑥한 양복으로 갈아입히고 최고급 이탈리아 수제화를 신겼다. 청중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매너를 가르친 후 365일 거의 매일 무대에 세우는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켰다. 이 시절 비틀스는 지금으로 치면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이나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밑에서 연습생 시절을 보냈다고나 할까.
이 원조 연습생들은 마침내 엡스타인이 마련한 오디션에 합격, 또 다른 은인 조지 마틴을 만난다. 마침 클래식 오보를 전공했던 조지 마틴은 그들의 음악에 현악 사중주를 도입하는 등 비틀스를 록 음악이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 넓은 음악세계로 인도한다. 음악평론가들은 두 조련사 조지 마틴과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종종 제5의 비틀스 멤버라고 말하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비틀스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잃은 미국인들 노래로 달래
비틀스가 리버풀 아니 영국을 벗어나 미국에서 영웅이 된 건 1964년의 일이다. 바로 직전 해인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을 잃은 미국은 슬픔에 잠겨 있었고 이때 비틀스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세련된 양복차림에 아름다운 가사로 사랑을 노래하면서 소녀 팬들의 가슴을 울렸고, 빌보드 차트 1위에서 5위를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미국방문 두달 만에. 소위 말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인의 침공)’을 일으킨 것이다.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모두 10억장 이상의 음반을 팔아치웠고 빌보드 차트 1위에 스무 번이나 올랐다.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또 1999년 ‘타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연예잡지 ‘버라이어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예인의 아이콘으로 비틀스를 등극시켰다.
비틀스의 음악이 어디가 그렇게 위대하기에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비틀스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만의 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비틀스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록앤드롤도 팝도 아닌, 그들만의 장르를 가지고 있어서다.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도 “비틀스 노래는 바흐의 푸가에 맞먹는다”라고 극찬했는데 ‘예스터데이’ 등 비틀스의 몇몇 음악 안에 담겨 있는 현악 사중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결합도 좋지만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 같은 앨범을 듣고 그들만의 실험정신, 분명한 색깔을 느껴서가 아닐까. 특히 ‘위드인 유 위드아웃 유(Within you Without you)’를 들어보면 5분의 4 박자에 맞춰 탐부라·스와르 만달·시타르 등 인도악기들이 바이올린, 첼로 같은 서양악기들과 결합해 오묘하면서도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사운드를 구현해냈다. 환각 상태를 연상시키는 이 음악은 매우 신비스럽다.
이렇게 비틀스는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으로 그들만의 예술성을 높여갔고 위대해졌다. 두 번째는 그들 멤버가 가진 뛰어난 보컬 구사능력과 악기를 다루는 솜씨다. 초기의 비틀스는 아주 단순한 화음이 강조된 노래로 박력 있는 후렴구를 곁들여 히트곡을 쏟아냈는데 자신감이 붙은 중기에는 호소력 있는 리드보컬 체계를 확립한다. 당연히 가사의 재료도 사랑·이별·만남 등 말랑거림에서 인생·사회현상 등으로 급이 높아졌다. ‘길고 험한 길’의 첫 소절 ‘당신에게 가는 길고 험한 길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만 봐도 얼마나 철학적인가. 이 수준 높은 가사에 걸맞은 음악을 구사하려다 보니 새로운 사운드를 위한 실험이 필요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결국 위대함은 한 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비평가와 대중은 공통적으로 쉽게 싫증을 잘 내는데 이들을 만족시키려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가슴을 때리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불린 부동의 1위곡은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다. 2500번 이상 리메이크됐지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석사·전문연주자 과정, 고려대 문화콘텐츠전공 박사, 경희대·강남대 피아노 전공실기 강사,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등 공연 콘텐츠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