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T-34를 벤치마킹해 개발한 독일의 5호 전차 ‘판터’. 1943년 배치돼 종전까지 독일의 주력 전차로 활동했지만 검증이 안 된 상태로 서둘러 실전에 투입되면서 곤혹을 치렀다. <사진 : 위키피디아>
소련의 T-34를 벤치마킹해 개발한 독일의 5호 전차 ‘판터’. 1943년 배치돼 종전까지 독일의 주력 전차로 활동했지만 검증이 안 된 상태로 서둘러 실전에 투입되면서 곤혹을 치렀다. <사진 : 위키피디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흔히 ‘전차군단’이라고 부를 만큼 독일은 세계 전차(tank)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전차를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아니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적합한 구조와 승무원의 수를 과학적으로 산출해냈다. 무엇보다 전차를 이용한 새로운 전쟁 기법을 완성했다는 점이 독일과 전차의 이미지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이는 전쟁사를 뛰어넘어 세계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4년간 모습은 참호를 뛰어넘지 못해 수백만 젊은이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아비규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소련군 전차 성능에 놀란 독일

1939년 10월 폴란드 점령을 완료한 직후,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 준비 지시를 내렸을 때 가장 강력히 반대에 나선 곳이 지난 전쟁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군부였을 정도다.

독일 군부 또한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굴욕을 주도한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보다 전력이 앞서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개시한다면 제1차세계대전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계속 전쟁을 요구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바꿀 생각까지 했을 만큼 그들은 몸을 사렸다.

하지만 독일은 1940년 6월,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켰다. 압승이었다. 이런 기적을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루한 과거의 전통만 답습했던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은 지난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철저히 분석해 속도와 집중을 통해 전력을 극대화한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공군의 호위를 받는 집단화된 기갑부대로 상대의 종심(앞뒤로 늘어선 대형·진지·방어 지대 따위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버린 이른바 ‘전격전(電擊戰)’이었다.

이런 놀라운 전략의 선봉장 노릇을 한 전차만 놓고 봤을 때 독일군은 연합군의 3400여대보다 수량이 1000대나 적었다. 하지만 보병 부대에 분산 배치한 연합군과 달리 독일은 필요한 곳으로 최대한 집중시켜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런데 전쟁 전의 우려와 달리 쉽게 승리하면서 문제점도 발생했다.

1934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하기 전까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차 개발과 보유를 금지당했다. 때문에 주변국에 비해 전차 개발 능력이 떨어졌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이 보유한 전차의 성능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화 등에서 묘사한 연합군 전차를 무지막지하게 압도하는 독일 전차는 정작 독일의 쇠퇴기인 1942년 이후에 등장했다.

히틀러의 전쟁 개시 요구에 몸을 사렸을 만큼 독일 군부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쉽게 꺾어버리자 이를 망각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소련을 침공해 6개월 동안 500여만명의 소련군을 소탕하고 약 20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소련이 항복하지 않고 독일을 물고 늘어지면서 전쟁은 대책 없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독일을 당황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소련의 전차였다. 그중 T-34는 독일의 기존 전차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결국 승리에 안주하면서 잠시 주춤하던 중(重)전차 개발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어 너무나 유명한 티거(Tiger) 전차가 1942년부터 전선에 등장했다. 하지만 당대 최강인 티거는 너무 비싸고 제작이 어려워 전선에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웠다.


새 전차 184대 투입, 40대만 가동

이때 독일이 선택한 방법은 어느덧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돼버린 T-34를 벤치마킹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존심은 그 다음의 문제였고, 그렇게 해서 1943년 탄생한 전차가 판터(Panther)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T-34를 모방했지만 성능은 훨씬 뛰어나서 종전 직전까지 독일의 주력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43년 7월, 모스크바 남쪽 500여㎞에 위치한 쿠르스크(Kursk) 일대에서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벌어졌다. 사실 격전은 이미 예정돼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독일 군부는 이왕 공격을 실시하려면 소련이 준비를 갖추기 전에 빨리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히틀러가 개발 완료 단계에 있던 판터의 배치가 이뤄진 이후에 하자고 주장해 한 달 정도 실시가 연기됐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는 그렇다치고 어쨌든 검증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서둘러 등판한 판터의 첫 실전 결과는 참혹했다. 이틀 만에 184대 중 겨우 40대만 전투가 가능했다. 문제는 피격당해 그런 것이 아니라 동력과 연료 공급 계통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선에서 이탈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후 문제점을 해결해 전투에 투입될 수 있게 되기까지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는 삼성이 야심차게 선보였다 단종이라는 아픔을 겪은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7’ 판매 중단 사태와 유사하다. 애플의 아이폰7에 앞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무리하게 출시한 게 화근이었다. 비록 판터는 데뷔가 실망스러웠지만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후 독일 전차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초유의 위기를 경험한 삼성도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근무, 무역 대행업체인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로 활동, 주요 저서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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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터(Panther)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중형전차. 1941년 6월 발발한 독·소전쟁에서 독일 기갑부대에 큰 충격을 준 소련의 T-34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됐다. T-34의 특징인 경사장갑을 채택한 독일의 첫 번째 전차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티거 전차와 함께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으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