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가 차기 행정부를 이끌 때 대중영합주의를 따를지, 실용주의적 중도주의로 접근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트럼프가 자신의 공약대로 대중영합주의적으로 움직인다면, 미국과 전 세계 시장은 공포에 휩싸일 것이며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트럼프가 공약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급진적 대중주의자로서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지, 중국산 수입품 높은 관세 부과 등을 추진할 것이다. 나아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간 장벽을 세우고 불법 체류자를 강제 송환하고 기술근로자 이민비자인 H16비자를 제한하는 한편, 오바마케어(의료보험)를 완전 폐지할 것이다.
트럼프가 공약대로 미 정부를 이끈다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크게 늘어날 것이다. 트럼프는 법인세와 부자에 대한 소득세 삭감을 약속했다. 세금 기반을 확대하는 반면, 부가세를 높이고 기업 해외 이익의 본국 송환을 장려할 것이다. 나아가 국방·공공 부문 지출을 늘리고 부유층에 대한 감세까지 약속했다. 이렇게 되면 미 정부의 수입은 향후 10년 동안 9조달러(약 1경원)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통화정책 기조도 크게 바뀔 것이다. 트럼프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재닛 옐런 의장을 매파로 교체하고 현재 공석인 위원 자리도 매파 위원으로 채울 것이다. 나아가 2010년 도입한 도드프랭크법을 폐지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설된 소비자금융보호국을 없앨 것이다. 또 대체에너지 보조금과 환경 규제도 철폐하는 등 대기업 활동에 장애가 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 볼 가능성이 높다.
공약 지키면 세입 10년간 9조달러 감소
급진적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미국과 동맹국 간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며 경쟁국과의 긴장도 고조시킬 것이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입장은 세계 무역 전쟁을 선동할 수 있으며 동맹국들에게 국방비를 낼 것을 종용하는 트럼프의 주장은 핵확산을 초래하고,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사실 트럼프는 급진주의 정책보다는 실용주의적 중도주의 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다. 트럼프는 이상만 추구하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협상의 예술’을 아는 사업가다. 트럼프에게 포퓰리즘은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전술이었지, 신념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트럼프는 부동산 전문가로 일평생을 사업가로 살았다. 그는 마케팅 전문가로서 공화당의 노동자 계층과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지지층을 공략했고 이를 통해 친기업, 친월스트리트, 친세계화 정치인으로 가득한 기존 정치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하면 공화당이 수십년 동안 주장한 공급자 중심의 경제정책을 펼 것이다.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인 마이크 펜스는 공화당 주류 멤버이며 트럼프의 경제 자문은 부유한 기업가와 금융인, 부동산 개발업자들로 구성돼 있다.
나아가 그는 내각을 공화당 주류로 채울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공화당 주류 의원과 기업인들이 대통령 트럼프의 정책을 만들 것이란 뜻이다.
미 행정부의 의사결정과정도 무시할 수 없다. 행정부는 정책 관련부처 및 기관이 분석한 내용을 보고받은 후 대통령에게 정책 옵션을 제안한다. 미국 정부에서 대통령의 결정권 자체가 제한적이란 뜻이다.
더욱이 트럼프는 정치 경력이 짧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처럼 보좌진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는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좀 더 중도로 옮겨가야 한다.
하원 의장인 폴 라이언과 공화당 상원지도부는 이민·무역·재정적자 문제에서 트럼프보다 공화당 주류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가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민간의료보험) 문제를 건드릴 경우 민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설 수도 있다.
트럼프는 미 정치체제의 권력분립, 정부 기관, 자유 언론의 감시를 받을 것이다. 시장도 부담이다. 트럼프가 급진적 대중영합주의 정책을 펼친다면 주식 시장은 폭락할 것이고, 미 달러화는 떨어지고, 투자자들은 돈을 빼 미 국채에 몰릴 것이고, 금값은 급등할 것이다.
트럼프가 전통적 친기업적 정책과 대중영합주의 정책을 조화롭게 잘 섞는다면, 시장이 바닥을 치진 않을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마당에 트럼프가 자신의 안위를 마다하고 포퓰리즘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실용주의자로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미칠 영향은 급진주의 시나리오에 비해 훨씬 범위가 제한적이다. 첫째, 트럼프는 TPP를 재고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힐러리 클린턴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는 NAFTA를 폐지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이해를 구하는 수준에서 조정할 가능성이 높다.
사업가 기질 발휘해 실용주의 택할 듯
둘째, 트럼프는 중국산 수입 차단을 시도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세계무역기구(WTO)가 중국 상품에 대한 ‘표적 덤핑’ 관세를 부과하지 않도록 판결을 내렸다. 트럼프가 선거운동 기간에야 중국과 대립각을 세웠겠지만, 일단 백악관에 입성하기만 하면 중국과의 협력이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셋째, 트럼프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벽을 쌓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500만~1000만명으로 추산되는 멕시코 이민자를 다 쫓아내지 못한다. 폭력 전과가 있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숙련기술자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술 분야의 역동성은 약화된다.
실용주의자로서 트럼프의 정책도 미 재정적자를 심화시킬 것이다. 공화당이 의회에 제안한 세제를 따를 경우 미국 재정수입은 향후 10년 동안 2조달러(약 2340조원)가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용주의 트럼프 행정부는 이념적으로는 일관성이 없고 재정적자 심화로 경제 성장에도 부정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투자자나 세계 각국에겐 실용주의 트럼프가 급진주의 행정부보단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고 봐야 한다.
▒ 누리엘 루비니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박사,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코노미스트,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자문위원, IMF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