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햄릿
셰익스피어 지음 | 설준규 옮김 | 창비
1만1000원 | 305쪽
“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대표하는 독백이다. “사느냐, 죽느냐-그것이 문제로다”로 구전돼 왔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로 변형되기도 했다. 그 번역이 올바른 것이냐는 질문도 끊이지 않았다. 단순히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만 해석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영문학자 최재서는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고 옮겼다.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존의 의미와 명분을 되돌아보는 햄릿의 태도를 강조한 번역이다. 최종철 연세대 교수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에 가장 적합한 순우리말을 골라 쓴 것이다.
올해 셰익스피어 400주기를 맞아 설준규 한신대 명예교수가 최근 낸 ‘햄릿’ 번역본은 그 독백을 남달리 옮겼다. 특이하게도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했다. 설 교수는 “삶과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햄릿에 관한 비평적 견해도 모아
설 교수의 번역을 통째로 읽어보자.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어느 쪽이 더 장한가, 포학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으로 받아내는 것,/ 아니면 환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 들고/ 대적해서 끝장내는 것? 죽는 것-잠드는 것,/ 그뿐.”
설 교수의 ‘햄릿’은 원문의 개성 있는 번역뿐 아니라 읽을 거리가 넘치는 부록으로도 눈길을 끈다. ‘햄릿’에 관한 서양의 비평적 견해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그 핵심만 정리해서 소개했다. 그중 이반 투르게네프의 ‘햄릿’ 해설이 재미있다.
“내 생각에 모든 인간은 두 유형 중 하나에 들어맞는다. 햄릿 아니면 돈키호테인 것이다. 돈키호테는 영원하고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믿음, 한 개인의 이해력을 넘어선 어떤 진리에 대한 믿음을 대변한다. 그의 삶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상, 곧 정의와 진리를 지상에 실현하는 일에 복무하는 한에서다. 그에게서는 자기중심성이란 추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 햄릿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무엇보다도 분석하고 꼼꼼히 따지는 태도, 자기중심성, 그리고 그 결과인 불신이다. 그는 전적으로 제 자신을 위해서 산다. 그는 에고이스트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까닭에 제 자신도 의심한다. 그는 과도한 자기비하를 즐긴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지만, 그 자기조롱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
반면에 ‘황무지’의 시인 엘리엇은 ‘햄릿’을 실패작으로 봤다. “이 작품에는 수정 과정이 아무리 다급했다고 해도 놓치기 힘든 불필요하고 일관성 없는 장면들이 남아있다”고 비판했다. ‘햄릿’이 예술적으로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한 사람들보다 ‘햄릿’이 흥미롭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법하다고 했다.
그러나 괴테는 ‘햄릿’을 시적으로 풀이했다. “아름다운 꽃을 품어야 할 값진 화분에 한그루 참나무가 심어졌고, 뿌리가 뻗어나가자 화분은 산산조각이 난다.” 설 교수는 “괴테를 비롯해 19세기 낭만주의 시기 평자들은, 대체로, 거칠고 험한 현실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너무도 섬세하고 여린 시인의 영혼이 햄릿의 내면에 깃들었다는 주장을 폈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