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승범>
<일러스트 : 이승범>

얼마 전 삼성전자가 자동차용 오디오 및 전장 부품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인 하만인터내셔널을 9조원도 넘는 돈(80억달러)을 주고 인수한 것이 화제가 됐다.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인수·합병(M&A)한 규모로는 사상 최대다. 삼성이 사들인 하만인터내셔널은 연간 매출이 70억달러(약 8조3000억원)에 달한다. 현대·기아차는 물론이고 BMW, 아우디, 벤츠, 페라리, 도요타, 혼다 등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를 고객으로 두고 있다.

지난 9월부터 삼성의 하만 인수 협상이 시작됐다는데 9조원짜리 거래가 두달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속도로 성사됐다. 삼성전자가 자동차에 정보통신 기술을 접목한 미래차 부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9조원을 쏟아부어 세계적 기업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장 선점 효과를 노린 것이다. 좋은 제품 만들어서 내다판 돈으로 차곡차곡 기업을 키우는 식으로 전형적인 제조업체의 성공 가도를 달려온 삼성이 최근엔 체질을 바꿔 글로벌 M&A 시장에 돈 들고 적극적인 기업 쇼핑에 나선 점은 고무적이다.


죽기 1년 전에도 회사 인수한 하만

그런데 삼성이 사들인 하만은 제조업체이긴 하지만 삼성과는 다른 경로로 기업을 키웠다. 미국 기업답게 일찌감치 M&A에도 눈을 떴다. 적극적인 기업 인수를 통해 회사를 오늘날 규모로 키운 것이다. 이 회사는 원래 보겐이라는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드니 하만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1953년 동료 버나드 카돈과 손잡고 차린 하만-카돈이 모태다. 막 등장한 하이파이 기술에 끌린 하만은 가정용 고급 오디오 제품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창업했다. 3년 후 동업자 카돈이 은퇴할 때 그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을 도맡았다. 사업가 기질이 다분했던 하만은 1960년대 들어 JBL 브랜드를 인수하고 돌비 음향 연구소와 협력하면서 1970년대에는 회사를 미국 스테레오 산업의 선두 브랜드로 키웠다. 동시에 자동차 사이드미러 제조업체 같은 것도 사들였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하만은 잠깐 ‘정치 외도’도 했다.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상무 차관 자리를 제안받자 이듬해 회사 지분 25%를 팔고 공직에 입성했다. 하지만 하만이 떠난 회사는 기업 가치가 형편없이 망가졌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가 엉망이 되는 걸 보고 하만은 정치를 접고 다시 기업인으로 복귀했다. 매각한 지분을 되사들여 회사를 재건한 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공격적으로 기업을 사들이면서 오늘날의 글로벌 회사로 키워나갔다. 1994년엔 오스트리아 음향 브랜드 AKG를 인수했다. 독일의 전장 부품 회사인 베커를 인수해 하만베커도 세웠다. 카오디오에서 다진 영향력에 전장 사업이 붙으면서 하만그룹은 오디오 시장을 넘어 전장 부품 시장에서도 강자로 거듭났다. 현재 하만의 매출 65%는 전장에서, 나머지는 오디오에서 나온다.

세계적 기업을 일군 건 하만이 나이 불문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기업가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죽기 1년 전에도 회사를 인수했다. 하만은 2011년 9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1년 전인 2010년 성사시킨 마지막 M&A가 단돈 1달러짜리였다. 당시 워싱턴포스트가 적자에 허덕이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를 매물로 내놨는데 하만이 이를 1달러에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빚투성이 ‘뉴스위크’의 부채 4700만달러까지 떠안는 조건이었다. 비록 저널리스트 출신은 아니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즐거움을 주는 좋은 저널리즘에 대한 믿음으로 투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뉴스위크’를 화려하게 부활시키려는 꿈은 이듬해 하만이 세상을 떠나면서 ‘미완의 도전’으로 남고 말았다. 그러고는 하만 사후 5년 만에 회사는 삼성에 9조원 넘는 몸값으로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