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군대는 전투력은 최강이지만 칭기즈칸 이전에는 제국을 만들지 못했다. 부족 단위의 독립적인 전투 방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유목군대는 전투력은 최강이지만 칭기즈칸 이전에는 제국을 만들지 못했다. 부족 단위의 독립적인 전투 방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몽골의 테무친(鐵木眞). 그는 일생에 세 번 위기를 겪었다. 13살 때 아버지가 독살됐다. 소년 부족장을 신뢰할 수 없었던 부족들은 3분의 2가 테무친을 버리고 다른 부족에 투항했다. 그중에는 자신이 친형처럼 따르던 사람도 있었다. 남아달라고 울며 부탁하는 테무친에게 그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 사건을 통해 테무친은 의리란 정이 아니라 용기와 타고난 모험심,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상대에 대한 존경으로 연결하는 미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족이 떠나자 사촌격인 타이치우드 부족이 습격해서 테무친을 노예로 잡아갔다.

테무친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광야에 숨어 있는 가족을 만나지만, 이때부터 모친과 4형제와 함께 광야를 떠돌며 수년 동안 수배자와 같은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초원에는 그를 도와줄 부족이 있었다. 아버지의 의형제이자 후원자였던 강대한 케레이트족의 지도자 토그룰칸도 있고, 약혼녀가 기다리는 사돈 부족도 있었다. 그러나 테무친은 절대 빈손으로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치와 유용성을 과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테무친은 성장해 명성을 얻자 약혼녀를 찾아가 결혼했다. 그 다음에 토그룰칸을 찾아갔다. 이것은 결코 자존심이 아니었다. 토그룰칸의 휘하로 들어간다고 해도 식객이 되는 것과 작은 동맹국이 되는 것은 다르다. 테무친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가지고 거래를 했다.


목표 추진 과정에서 동지 찾아내

어릴 때 배신과 인간의 냉혹함을 본 그는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거래이며, 인간의 가치와 상호신뢰는 그가 지닌 유용성으로 결정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자기 사람을 만들고 자신이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려면 자기 집단의 목표를 공유하고, 리더가 창의적인 목표와 과제를 제시했을 때 거기에 호응하는 태도를 봐야 한다. 인간적인 정은 모래성이었다.

광야 시절 테무친은 말을 훔쳐간 도적을 추적하다가 보르추라는 청년을 만났다. 보르추는 단신으로 도적을 추격하는 테무친을 보고,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둘은 수십명의 도적집단에서 말을 도로 훔쳐 탈출했는데, 적의 추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어린 시절 형처럼 지내던 사람은 그를 배신했지만, 광야 추격전에서 만난 보르추는 테무친의 평생 동지가 됐다.

이 교훈은 분명하다. 뚜렷한 목표, 목표 추진의 과정을 통해서만 나의 동지와 능력자를 찾아낼 수 있다. 전쟁도, 의형제감을 찾고 주군을 찾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험이다. 모험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런 능력과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부하이자 동지가 될 자격이 있다. 테무친은 전쟁과 정복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동지와 유능한 부하들을 늘려 나갔다.

마지막 위기는 바로 ‘굽타산 전투’였다. 테무친은 토그룰칸의 신뢰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어느덧 그의 휘하가 아니라 동맹세력으로 자기 위상을 높였다. 늙은 칸은 끝까지 테무친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지만, 칸의 아들과 부족장들은 그렇지 않았다. 케레이트족 최고의 장군이며 어린 시절의 친구로 알려진 자무카가 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테무친은 위기에 빠졌다.


‘싸우고 있다’는 목표 보여준 굽타산 깃발

몽골족은 모든 힘을 짜내 분투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기병이 주력을 이루는 유목부족의 전투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밀집대형을 구성하지만, 보병과 같이 견고한 대형을 유지하며 싸우기는 힘들다.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하나의 무리는 여러 개의 무리로 나눠진다. 잘게 쪼개지고 주변에 아군이 보이지 않고 적군들만 보이게 되면 자신들이 지고 있는 것이다. 유목군대는 기본적으로 자기 씨족, 부족 조직을 토대로 구성되기 때문에 난전이 되면 부족별로 뭉치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계속해서 싸울 것인지 활로를 뚫고 탈출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한두 부족이 전장을 이탈하면 남은 부족에 대한 압력이 가중된다. 그러면 또 이탈하고 남은 자는 몰살을 피할 수 없다. 오후 무렵 테무친의 눈에 들어온 전장은 딱 이런 순간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충격으로 이성을 잃거나 체념하고 운명의 여신 앞에 무릎을 꿇을 시점에 테무친은 얼마 전에 자신의 동맹세력으로 들어온 마누트족의 부족장인 길다르를 불렀다. 그는 테무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테무친은 적의 대형 뒤편에 솟아 있는 굽타산이라는 봉우리를 가리켰다. “저곳을 정복하라.” 굽타산으로 가려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산에 오르면 적에게 포위되고 퇴로는 없다. 기마술에는 자신이 있던 몽골인들에게 옥쇄작전은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적진으로 뛰어든 길다르는 굽타산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산 정상에 테무친의 깃발을 꽂았다. 굽타산의 깃발은 평원에서 악전고투 중인 몽골 전사들에게 분명한 메시지였다. 테무친은 아직 싸우고 있다. 사방으로 흩어진 몽골 부족들은 녹아들고 줄어들고 있었지만 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날이 저물자 케레이트족은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테무친은 산악지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참패했다고 해도 굽타산의 깃발은 몽골인에게 전설이 됐다. 더 중요한 것은 테무친의 지도력과 자신들의 단결력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몽골족은 꽤 힘든 생활을 해야 했지만, 테무친의 지휘 아래 새로운 전술을 연마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술을 갈고닦으면 무적의 군대가 되고 더 강한 적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 신뢰와 믿음이 부족 간의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전투 방식을 바꿨다. 유목군대가 전투력은 최강이지만 테무친 이전에 제국을 만들지 못한 이유는 부족 단위의 독립적인 전투 방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무친은 유목군대 역사상 처음으로 이 벽을 넘었다. 전술적으로 조직되고 통제되기 시작하자 유목군대는 전혀 다른 군대가 됐다.

칭기즈칸(테무친)의 성공비결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굽타산 전투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굽타산의 깃발은 테무친의 기지와 전술적 판단력이 돋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성공비결은 길다르와 같은 전사, 절망적인 상황에서 산 위의 깃발을 보고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을 양성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인간적인 의리와 우정이 아니라 테무친의 조직운영 방식 자체에 있었다.

여기서 기업의 목표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느 기업이나 목표가 있고 사훈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맞춰져 있을까. 세계 최고가 되자, 일등이 되자는 것은 이상이지 목표가 아니다. 어떤 목표는 철학적, 사변적 구호에 가깝다. “수주액 100만달러 달성” “판매액 1위 달성” 이런 것은 올해의 사업목표이지 기업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기업의 목표란 기업이 추구하는 이상을 향한 기준이 돼야 하고 특히 인재를 양성하고 판별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 임용한
연세대 사학과 석사,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등에서 한국사, 군제사 강사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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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속에서 뜻 맞는 동지·부하 찾아 목표 공유 부족 부대를 국가 단위로 통합해 무적 만들어

칭기즈칸 몽골 제국의 건국자로, 본명은 테무친이다. 1189년 몽골 여러 부족들의 추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칸’은 유목 민족 최고 지도자를 의미한다. 1204년 몽골 고원을 통일했고 1206년 몽골 제국을 세웠다. 1207년 군사 조직을 정비해 서하를 정벌했다. 이후 이슬람 세계의 일인자 호라즘 제국과 마찰이 일자 1219년 서방 원정을 떠났다. 호라즘은 물론 멀리 러시아 부근까지 점령하는 등 대국가를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