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감미로운 선율은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오데트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애절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이 공연하는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사진 : C영상미디어 양수열>
차이콥스키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감미로운 선율은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오데트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애절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이 공연하는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사진 : C영상미디어 양수열>

모스크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연과 극장문화다. 시내를 걷다 보면 드라마·코미디(희극)·뮤지컬 등을 선보이는 극장 약 35곳을 만날 수 있다. 공연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극장 이름을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에서 공연·극장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모스크바 최고(最古)의 극장 말르이부터 볼쇼이 등 다양한 극장이 러시아인들의 문화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말르이 극장 건너편에 위치하며 오페라와 발레로 유명한 볼쇼이 극장은 1856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여덟 개의 기둥으로 된 고전주의적인 주랑 현관(여러 개의 기둥을 줄지어 세운 현관) 위에는 태양을 운반하는 전차를 몰고 있는 아폴론 신의 청동 조각상이 있고, 극장 내부는 붉은 벨벳과 금띠가 둘러져 있어 황홀하다.


오페라 관람료 3배 넘는 발레 티켓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볼쇼이 극장과 볼쇼이 발레단은 종종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 마린스키 발레단과 비교되곤 한다. 마린스키 극장은 푸른빛이 도는 벽과 커튼, 벨벳의자와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사치스러움이 감도는 분위기다. 이 극장의 발레단은 정교함과 섬세함으로 다져진 러시아 발레의 자존심이다. ‘볼쇼이(러시아어로 ‘크다’는 뜻)’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볼쇼이 극장은 마린스키 극장보다 규모가 크고, 발레단의 동작 역시 역동적이며, 당당하고 남성적이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발레가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문화를 계승한 고전발레의 완성품이라면 예카테리나 여제가 창단한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는 혁명적이고 강한 소비에트 느낌의 발레로, 전 세계에 명성을 날렸다.

러시아의 유명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안무로 선보이는 ‘스파르타쿠스’는 볼쇼이 발레단의 대표작이다. 보통 오페라 티켓 가격이 200달러 정도인데 비해 발레 티켓 가격은 600~1000달러 수준일 정도로 비싸지만, 한번쯤 볼쇼이 극장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보길 권한다.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은 티켓값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다.

모스크바의 음악을 논할 땐, ‘모스크바 음악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설립자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스승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다. 이후 차이콥스키가 이 음악원의 교수가 되면서 음악원 이름도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바뀌었다.

음악원 내부의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홀에서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가 4년마다 개최된다. 이 음악원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부터 전 세계 많은 음악 영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공부하길 원했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깊다.

모스크바 악파의 대명사인 차이콥스키는 사실 부모의 반대로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고, 법률학교를 마친 뒤, 법무성의 일등 서기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갈망이 그를 페테르부르크 음악학교로 이끌었다.

스승이었던 루빈스타인은 그에게 서구적인 작곡 기법을 전수했고, 차이콥스키는 슬라브적인 전통음악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작곡가로 성장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힘차고 화려하며 정열적이면서도 우울하다. 감정으로 치면 이른바 조울증과도 비슷한데, 실제로 그는 고독했고 소심한 성격에다가 자주 불안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소심한 성격 덕분에 오늘날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발레의 명작이 탄생했다.

당시는 발레 안무가 음악보다 우선인 분위기여서 안무가의 권위가 작곡가의 권위보다 높았다. 많은 작곡가들이 독선적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의 작업을 견디지 못했고 안무와 음악이 따로 노는 공연을 선보였지만, 소심한 차이콥스키는 전적으로 안무가에 맞춘 음악을 작곡했다. 그 덕분에 안무와 음악이 흠 잡을 데 없는 조화를 이룬 완전무결한 발레 공연이 탄생한 것이다.


서구적이면서도 러시아적인 차이콥스키 음악

이제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을 살펴볼 차례다. 먼저 4번부터 6번의 후기 교향곡은 각 곡이 갖는 음악적 향취가 분명하다. 4번은 러시아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5번은 4번에 비해 극도로 세련돼졌다. 풍부하게 느껴지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에는 밝은 빛깔에 도취된 승리감마저 배어 있다.

필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교향곡 6번 ‘비창’은 구성이 매우 특이하다. 보통 교향곡은 1악장은 빠르게, 2악장은 느리게, 다시 4악장으로 가면서 빠르게 진행된다. 하지만 비창은 2악장이 빠르고 4악장이 느린 구성으로, 3악장에서 곡이 끝나는 느낌을 줘 청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4악장의 비장함은 그의 불행했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듯 강한 여운을 남긴다.

차이콥스키의 화려한 음악적 기교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다. 협주곡 1번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가장 정복해 보고 싶은 곡으로 꼽히는데, 시작부터 쏟아져 내리는 화음의 폭포는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3악장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 곡을 들으면 누가 차이콥스키를 러시아적이 아닌 서구적인 작곡가라고 말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호방함과 강인한 저력을 지닌 러시아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아주 빠른 기간에 작곡했다. 그는 자신을 후원하던 과부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오늘 아침 저는 불타는 영감이 끝없이 타올랐습니다. 이번 협주곡은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렬한 음악이 될 것 같습니다. 작곡하는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이 곡은 그의 글대로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하다. 필자는 차이콥스키야말로 자신의 예술성으로 음악적 관능미를 최대한 끌어올린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서구적 스타일과 러시아적 음악 전통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한 흔적들이 일과 사랑 속에서 번민하다 마감한 그의 일생과 몹시 닮아 있다.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석사, 고려대 문화콘텐츠 전공 박사,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등 공연 콘텐츠 제작


Plus Point

러시아 고전극의 전당 ‘말르이’

말르이 극장.
말르이 극장.

1824년 문을 연 말르이 극장의 비공식적 이름은 ‘오스트롭스키의 집’으로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오스트롭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극작가로 약 50편의 희곡을 발표해‘러시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렸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 이전에 러시아 연극계를 지배했다. 이곳에서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품격 있는 러시아 고전극을 볼 수 있다.

또 유명한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연기론의 체계를 확립한 대가 스타니슬랍스키(배우이자 연출가)와 극작가 네미로비치단첸코가 활약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