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를 목격한 후 정치 제도에 대한 불신이 시장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의 책 ‘자본주의 4.0’을 썼다. 그로부터 5년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이것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한 ‘세계화의 첫 붕괴’ 이후 노동자 계급의 권리를 확대하는 내용의 개혁법이 뒤따랐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영국 중심의 식민지 제국주의가 붕괴되자, 미국에서 뉴딜 정책과 복지국가 정책이 등장했다. 1968년 케인스주의가 힘을 잃은 후에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가 일어났다.

필자는 저서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대격변이 뒤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본주의 모델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면 물질적 보상 덕분에 정치적 변화의 압박은 줄어든다. 그러나 경제가 실패하면 자본주의의 사회적 부작용은 정치적 독배가 되어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2008년 이후 벌어진 일들을 설명한다.

자유 무역, 규제 철폐 및 통화 확대가 일시적 은행위기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긴축 정책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뉴노멀’로 귀결되면 불평등이나 실직, 문화적 붕괴는 사회적으로 더 이상 용인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정부의 강력한 세금 확대 정책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시대에 힘을 못 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중도 개혁 성향의 정치인은 급진주의 정치인에게 필패하기 마련이다.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두고 이민이나 무역, 기술 탓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민, 무역, 기술 발달이 전체 국민 소득을 늘릴지언정, 소득 재분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를 개선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의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다.


트럼프 경제 정책은 수요관리 통한 완전고용

첫째, 거시 경제 측면에서 정부는 기술발전과 세계화로 늘어난 공급만큼 수요도 그 수준에 맞춰 늘려야 한다. 1990년대 초반 영미권에서 지지를 받은 케인스의 ‘수요관리’ 기법이다. 케인스주의는 2009년 유럽 재정 적자 위기 때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도널드 트럼프 신임 정부의 경제 정책은 케인스식 수요 관리의 귀환으로 요약될 것이다. 미국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물가상승률 목표 달성이라는 도그마를 포기하고, 수요 관리를 통한 완전 고용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은 몇년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유럽은 사회적 성과와 경제 구조에 있어 정부 개입에 대한 지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시장 근본주의 즉 신자유주의는 중대한 모순을 감추고 있다. 자유 무역과 기술 발전은 개인에게 해가 되더라도 사회 전체로 봤을 때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정당화됐다. 사회 후생이 개선되면 승자가 패자에게 보상할 수 있으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파레토 최적’의 원리는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모든 도덕적 주장의 근거가 된다. 자유 시장에서 발생한 이익을 정치적 결정을 통해 일부 재분배할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각국 정부는 금융과 무역 규제를 완화하고 경쟁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했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승자에서 패자로의 이익 재분배에 필요한 이론적 조건을 구현했다. 그러나 시장 근본주의자들은 재분배를 오히려 막아섰다. 정부가 개입하면 기업 이익이 줄고 경쟁이 왜곡돼 사회 전체의 경제 성장이 줄어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기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사회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엔 남성과 여성이 있고, 또 가족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경쟁의 사회적 이점을 강조하느라, 사람을 무시했다. 즉 시장경제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개인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꼴이 돼 버린 셈이다. 2016년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사회 전체는 이익을 보지만, 뒤에서는 개인이 피해를 보는 신자유주의의 치명적 모순이 재조명됐다.

자유 무역, 시장 경쟁, 기술 발전이 지속하려면, 성장에서 얻는 이익을 재분배하기 위한 정부 개입이 이어져야 한다. 1970년대처럼 세금을 많이 걷고, 인플레이션과 정부 의존적 문화로 돌아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정 및 통화 정책을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재분배 역시 세금을 복지 재원으로만 사용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탈리아 명품거리를 쇼핑백을 들고 거니는 관광객 반대편에 노숙인이 잠을 청하고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일부지역은 실업률이 고공행진하면서, 이민 문제·불평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이탈리아 명품거리를 쇼핑백을 들고 거니는 관광객 반대편에 노숙인이 잠을 청하고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일부지역은 실업률이 고공행진하면서, 이민 문제·불평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독일·스칸디나비아식 재분배 정책 주목해야

정부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으로 어려움을 겪는 근로자와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재분배 정책을 고안할 수도 있다. 구조조정의 대가로 근로자들에게 현금을 쥐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산업 보조금과 최저 임금법 등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성장의 혜택을 재분배할 수도 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학생과 실직 근로자에게 제공하는 직업 교육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나라 정부는 반대 방향의 정책을 선택했다. 세금을 줄이고 교육과 산업 및 지역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 조기 퇴직을 조장하는 건강보험과 연금 및 현금 지원에 돈을 쏟아부었다. 정부의 재분배 정책은 자유무역과 이민정책으로 일자리를 위협받는 저임금 청년 근로자보다는 세계화의 수혜를 누린 금융권 엘리트와 연금으로 경제적 안정을 보장받은 노년층에 집중했다.

역설적이게도 올해 정치적 혼란은 노년층 유권자가 주도했다. 청장년층은 대부분 현상 유지를 지지했다. 이 같은 패러독스는 금융위기 이후의 혼란과 환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든 나쁘든 간에 필자가 ‘자본주의 4.1’이라고 지칭했던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한 탐색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
게이브칼 드래고노믹스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공동 의장, ‘자본주의 4.0’의 저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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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주의 경제학자인 존 마이어스 케인스(J.M. Keynes, 1883~1946)의 저작으로부터 나온 경제사상. 유효수요 원리에 입각, 경기 순환을 안정시키고, 완전고용을 실현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케인스는 19세기 고전파 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보고, 국가가 유효 수요를 늘려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