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구 니시신바시(西新橋) 모리타워 맞은편 7층 건물의 한 강의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안대로 눈을 가리고, 옆 사람과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식사를 함께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직함도 주소도 이름도 모른다. 자리에는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퇴직 후 재취업을 원하는 사람을 위한 교육장소인 ‘사회인재학사(社会人材学舎)’의 수업 장면이다. 수강자의 3분의 2는 남성이며, 대부분이 대기업 퇴사자들이다. 눈을 가리고 점심을 먹는 독특한 수업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훈련한다는 취지에서 개발됐다.
정년 65세지만 60세부터 퇴직 권유
마쓰히코 오자와 사회인재학사 소장은 “수강자들이 대기업의 직원이나 사업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교류하도록 하는 것도 재취업 교육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수업 중에 이름이나 직함 등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된다. 사무실의 계급을 재현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오자와 소장은 “퇴직자들이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잃어버린 20년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일본에서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이 사라지는 분위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베노믹스’를 구성하는 세 개의 화살(대규모 양적 완화, 재정확대, 구조개혁) 가운데 노동 및 기업 구조 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일본 직장인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1980년대 종신고용제는 일본 기업의 최대 강점으로 꼽혔다. 기업은 직원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직원은 회사에 충성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주목받고 있다. 능력보다 연공서열, 상사와의 관계가 중시되다 보니, 회사가 퇴보한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 대기업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서열 순서대로 승진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베 신조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낸 아시로 나오히로는 이 같은 종신고용 제도는 “1945년 전후 호황기의 산물”이라며 바꿔야 할 문화로 지적하기도 했다.
직장인 체감 경기는 7개월 연속 하락세
일본 주요 대기업의 정년은 65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60세가 되면 퇴직을 권유하고 있다. 히타치는 종신고용을 계속하고는 있지만, 최근 성과 연동 보수와 승진 제도를 도입했다.
최근 들어서는 40~50대 직원들에 대한 ‘희망퇴직’도 확대되는 추세다. 샤프는 지난해 8월 45~59세 국내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해 총 3234명을 해고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버블 경제 붕괴로 노동환경이 크게 바뀌었지만 직장인들의 심리적 부담은 여전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본에서 정규직으로 취직해 가정을 이루는 것은 힘들어졌다. 현재 일본 근로자 10명 중 4명은 비정규직이다.
일본에서 40~50대에 조기 퇴사를 하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사회인재학사의 수강생인 이토 히로유키는 얼마 전 23년 근무한 대기업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틀에 박힌 생활이 싫었다”고 퇴사 이유를 밝혔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위해 교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현재 50세 기준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남성 82.39세, 여성은 88.13세다. 이를 역산하면 일본인 직장인은 20대 중반에 취업해 약 40년간 직장생활 이후 퇴직하고 25년을 직업 없이 지내다 85세 전후에 죽는다. 60세가 넘어 재계약을 하면 임금피크제가 적용돼 월급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과거와 달리 정년퇴직 후 남은 세월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50대 이상의 세대는 이직을 반복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베 신조 총리 아베노믹스의 공격적인 경제 살리기 정책이 기업 심리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일본 직장인의 체감 온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새다. 근로자 가구당 소비지출은 7개월 연속 전년 대비 실적을 밑돌았다.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지난해 11월 가계조사에 따르면 2인 이상 가구의 소비지출은 27만848엔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5% 감소하며 9개월 연속 전년 실적보다 낮게 나왔다. 근로자 가구당 소비 지출은 29만4019엔으로 전년 동월 대비 0.9% 줄었다.
일본 신세기은행이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일본의 평범한 직장인의 한 달 용돈(점심 식대 포함)은 3만8457엔(약 40만원)을 기록했다. 이는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며 1982년 3만4100엔 이후 두 번째로 적은 수치다. 한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경제 개혁의 목적으로 위계질서 최하단에 있는 아르바이트생과 비정규직 직장인에 대한 권리 확대를 약속했으나 비정규직 임금 정상화, 동일노동 동일보수의 내용을 담은 급진적 개혁안은 대기업의 거센 반발로 입법 첫 단계에서부터 막혀 있는 상태다.
종신고용과 노동시간
일본 근로자의 긴 노동시간을 ‘종신고용’ 탓으로 돌리는 연구도 있다. 일본 정규직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5년 기준 1719시간으로 독일이나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400시간 이상 많다. 다만 한국의 근로시간(연 2113시간)과 비교하면 394시간 적다.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종신고용 시스템은 나이만 먹으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구조지만, 반대로 직장인은 고용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대기업 직장인은 자택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자회사로 발령이 나도 거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일본 대기업 직장인 가족은 상당수가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일본 대기업들은 종신고용제를 아예 포기하지는 못한다. 인재들이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회사에 몰리기 때문이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가오리 카타 교수는 “종신고용 기업에 대한 좋아하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위험성 회피 문화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