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승범>
<일러스트 : 이승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이볼’하면 얼음 채운 긴 잔에 소다수와 위스키 섞은 칵테일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일본에서 특히 즐겨 마신다고 한다. 한국에 치킨에 맥주를 곁들여 마시는 ‘치맥’ 문화가 있듯, 일본에는 일본식 닭튀김 ‘가라아게’와 ‘하이볼’의 궁합을 가리키는 ‘가라하이보루’라는 음주 문화도 있다.

하이볼(high ball)은 영어 표현 그대로 높은 투구 혹은 송구를 뜻하기도 한다. 반대로 투구나 송구가 낮으면 로볼(low ball)이라고 한다. 얼마 전 통상 전문가인 안세영 서강대 교수가 낸 신간 ‘도널드 트럼프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에 ‘하이볼’ 구절이 흥미로워 소개한다.

트럼프의 ‘하이볼’이란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 하이볼 칵테일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자처럼 거침없는 협상가 트럼프의 전략 중 하나가 ‘하이볼’이다. ‘하이볼’로 가격을 확 후려치는 솜씨가 남다른, 가격 협상의 달인이 바로 트럼프라는 얘기다.

1980년대에 트럼프가 구입한 요트 이름이 ‘트럼프 프린세스호’다. 스위트 객실이 11개나 되며 수영장에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갖춘 초호화 요트다. 당시 가격이 1억5000만달러쯤 했는데 트럼프는 이 요트를 5분의 1 가격인 3000만달러에 사들였다고 한다.

트럼프는 방이 무려 118개나 되는, 호가 2억5000만달러까지 나갔다는 플로리다의 대저택도 1000만달러가 안 되는 돈에 사들였다.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Mar-a-Lago)에 있는 이 리조트는 1920년대에 지어진 지중해풍 저택이다. ‘포스트 시리얼’ 상속녀인 마조리 메리웨더 포스트가 지은 집이다. 1973년 포스트가 사망하자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애물단지처럼 방치돼 있었다. 이를 트럼프가 1985년에 1000만달러 안 되는 돈에 사들여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리조트로 바꿔놓았다. 내부는 금으로 장식돼 있고, 정원 크기가 축구장 11개를 합쳐놓은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구들로 장식돼 있다. 미국 언론들은 프랑스 베르사유궁전보다 더 화려하다며 이를 ‘트럼프의 베르사유’라고 표현했다.


상대방의 절박함 이용해 가격 후려쳐

그런데 아무한테나 이런 ‘하이볼’이 통하는 건 아니다. 오랜 단골이나 가격 흥정을 싫어하는 사람들한테는 적절하게 가격을 제시하는 ‘로볼’ 전략이 필요하다. 반면 거래 상대방한테 약점이 있다는 걸 알거나, 딱 한 번 승부하는 거래일 때는 ‘하이볼’로 강하게 때리는 것이 꽤 통한다. 트럼프한테 요트를 판 사람은 당시 자금 사정이 매우 절박했고, 마라라고 저택 역시 방치된 상태였기에 그런 가격 후려치기가 가능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이 ‘하이볼’ 카드를 거침없이 꺼내들고 있다. 작년 12월 보잉의 최고경영자(CEO) 데니스 뮬렌버그가 시카고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를 비판했다. 유럽 에어버스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보잉이 자사 항공기의 4분의 1가량을 중국에 팔고 있는데 트럼프가 중국 제품에 대해 고율 관세를 매기게 되면 중국이 보잉 대신 에어버스를 구매해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러자 트럼프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보잉이 생산하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 포스 원’의 가격이 어리석을 정도로 비싸다”고 보잉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주문 취소’라는 두 단어를 트위터로 날렸다.

트럼프는 연간 2000억달러에 달하는 미 국방성의 무기 구입 내역에 대해서도 동전 한 푼까지 철저히 따져서 가격을 깎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잉, 록히드 마틴, 맥도넬 더글러스 같은 방산업체에 초비상이 걸렸다.

이런 터프가이 협상가를 맞아 한국이 어떻게 타격을 덜 입으면서 실익을 챙기느냐가 트럼프 행정부 시대의 한·미 관계에서 최대 과제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