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타히티 말로 ‘야만인’을 뜻하는 도자기 작품 ‘오비리(OVIRI)’를 살아서는 정원에, 죽어서는 무덤 앞에 두고 싶어 했다.
고갱은 타히티 말로 ‘야만인’을 뜻하는 도자기 작품 ‘오비리(OVIRI)’를
살아서는 정원에, 죽어서는 무덤 앞에 두고 싶어 했다.

격변의 시기 또는 현재가 고통스럽고 미래가 암울할 때, 사람들은 종종 과거에서 지혜를 구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예술가들이 그랬다. 이때는 철강, 전기, 화학공업 등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새로운 기술, 소재, 기계의 발명 덕분에 인간의 생산 활동이 눈부신 도약을 이룬 시기(소위 2차 산업혁명)다.

문명은 축복과 더불어 저주를 잉태하고 있다. 서양 문명의 브레이크 없는 탐욕은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발전해 식민시대, 제1차세계대전, 나치즘, 제2차세계대전, 냉전 등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를 만들었다. 축복은 자본가와 서구 열강의 차지였고 저주는 노동자와 식민지의 몫이었다.


원시주의 미술 개척한 고갱

예술가들은 이 시기를 기대와 두려움, 희망과 좌절로 통과했다. 누리는 사람에게는 천국이었고 당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다. 폴 고갱은 문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는 문명 세계에서 먹는 끼니보다 거르는 끼니가 더 많았다. 풍요 속 빈곤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고갱은 자신의 불행이 문명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원시적인 것, 이국적인 것, 야만적인 것을 찬양했다. 1889년에는 “나는 야만성에 기반을 둔, 좀 더 자연적인 것으로, 썩은 문명에 대적하고자 한다”고 선언하면서 원시주의(Primitivism) 미술의 개척자가 됐다.

아프리카 가면을 처음 예술에 도입한 것은 야수주의 화가들이다. 블라맹크는 1905년 여름 어느 날, 한 카페에 걸려있는 아프리카 가면의 ‘원시, 본능적 아름다움’에 감전됐다. 가면을 구입한 블라맹크는 마티스와 드랭을 불러 보여줬다. 마침 대상의 진실이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는 전통적인 방식에 좌절하고, 고흐와 고갱의 ‘원시적인 색채와 양식’을 존경하던 이들은 아프리카 가면에서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대상을 본능적,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원시적인 색채와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군더더기가 제거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에서 아내의 모습을 원색의 물감으로, 아프리카 가면처럼 그렸다. 이들의 작품은 야성적이고 강렬했다.

1906년 가을 어느 날, 피카소는 스타인이라는 컬렉터의 집에 들렀다. 그 집에는 마티스가 먼저 와 있었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들고 있던 아프리카 나무 조각 ‘흑인 두상’을 보고 전율을 느낀다. 그는 곧바로 아프리카 가면을 보기 위해 민족학박물관을 찾았다.

피카소는 훗날 신비롭고도 무서웠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분명 그날이었다. 단순히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처음으로 퇴마(귀신을 쫓아내는 일)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렇다!” 피카소가 본 아프리카 조각은 ‘정체불명의 기이하고 사악한 힘’이 서려 있는, ‘귀신을 퇴치하려고 만든’ 주물(呪物), 마법(魔法)이 깃든 물건이었다.

야만성은 원시인에게 있듯이 어린아이에게도 있다. 고갱은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근원,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이 나를 구속한다”며 “예술가들이 원시성과 본능, 궁극적으로는 상상력을 빼앗기면서 창조의 요소를 찾지 못한 채 미로를 헤맨다”고 했다.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법을 배울 때까지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어린이의 순수함은 제도권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표현하도록 강요한 ‘지식과 기술’의 부재에서 나온다.

문명화된 유럽 전통에 속하지 않는 미술을 원시주의 미술이라고 부르는데, 제도권의 화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화가의 미술도 원시주의로 분류한다.


피카소는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을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프랑스에서 가장 솔직한 심리 초상화’라고 평가했다.
피카소는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을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프랑스에서 가장 솔직한 심리 초상화’라고 평가했다.

루소의 천재성 발견한 피카소

피카소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한 중고품 가게에서 마주친, 어떤 아마추어의 그림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작품을 캔버스값에 불과한 5프랑에 사서, 작업실의 가장 좋은 장소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프랑스에서 가장 솔직한 심리 초상화’라고 평가한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이었다.

화가들로부터 ‘두아니에(세관원)’라고 불린 루소는, 40살이 다 돼서야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요화가(Sunday painter)였다. 기본이 안 된 그의 그림은 늘 웃음거리였다. 루소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화가들의 친구가 되게 해준 것은 피카소였다. 제도권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거주한 몽상가 루소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은 다른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즐거움을 줬으며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됐다.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도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학습을 받았거나 ‘기술’에 천재성을 보인 화가들은 아니었다.

서양에서 기술과 예술에 구분이 생기고 예술이 기술로부터 독립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그 이전에 예술은 없었다.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특정 계급을 위한 장식물이 있을 뿐이었다. 기술은 전문적인 지식체계에 의해 양식화됐으며 관습, 전통, 가치로 굳어졌다. 폭동이나 혁명,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장식물들이 파괴되는 것은 특정 계급의 가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언스트 곰브리치는 ‘예술의 기술로부터의 독립’을 ‘20세기 초 전 유럽을 휩쓸었던 위대한 예술혁명이 획득한 불멸의 수확’이라고 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는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의 미학은 사물을 모방·재현하는 것에서 출발해 인간의 내면 혹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표현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 김순응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경영학 석사,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 서울옥션 대표, 케이옥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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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주의(primitivism) 인간의 사고나 제도와 같은 문명사회의 조직에 의해 성취된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인간적 가치의 기준으로 보는 입장. 예술 분야에서는 각종 기법이 동원된 형식미보다 정서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직관적인 사고를 중요시한다. 문명화된 전통 양식에 속하지 않는 미술, 제도권의 화가 집단에 속하지 않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화가의 미술을 원시주의 미술로 분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