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 경제에 대해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여기서 일본은 예외다. 일본은 세대를 걸쳐서 경기 하방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선진국 경제에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잦아들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선진국 경제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경험했다. 미국의 확장적 통화 및 재정 정책이 불을 댕겼고, 1970년대 국제 유가 상승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낮은 경제성장률과 높은 물가상승률을 결합한 용어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당시 전 세계 경제의 화두였다.

그 당시 시장 예측은 석유와 원자재 가격 상승과 같은 동향을 미루어 짐작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고 정치인들은 물가 통제와 임금 정책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 선진국의 실질 금리는 상당기간 마이너스를 유지했다.

1979년 10월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 의장이 미국 통화 정책을 통화 축소 노선으로 전환하며 이른바 ‘확장 사이클’의 시대가 마감됐다. 경제계의 화두는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으로 바뀌었다. 선진국 물가 상승률은 두자릿수에서 한자릿수로 하락했다.


트럼프 부양책 물가 상승 기대 높여

디스인플레이션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디스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통화 발행을 억제하고 재정·금융긴축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조정정책을 뜻한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선진국 단일 경제 연평균 성장률이 마이너스(디플레)를 기록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개발도상국의 물가상승률은 세자릿수로 급등했고 일부 국가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1991년 그리스의 물가상승률은 20%를 기록했고, 물가가 가장 안정된 국가로 꼽혀 왔던 스위스의 물가상승률도 5%를 넘었다.

2013년 국가 부도 위기 이후 그리스 물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보자면, 이는 마치 먼 옛날 이야기같이 들릴 수도 있다. 스위스도 최근 몇 년 동안 스위스 프랑 가치가 급등하면서 스위스중앙은행이 프랑 절상에 따른 디플레이션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상황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촉발한 경제적 금융적 혼란으로 국가 경제에 디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요소들이 해금됐다. 민간 기업의 디레버리징은 중앙은행의 재정비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지난 2009년 선진국 경제의 3분의 1이 물가 하락을 기록했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 세계 경제에서 디플레이션 발생률은 전후 표준을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계속 낮췄고 현재의 낮은 수준(약 2%)을 유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기 부양책은 경기순응적(procyclical·호황기에 돈을 풀고 불황에 대출을 회수하는 행태)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정책은 미국 경제가 완전 고용 상태일 때에만 구동력을 가지며 나아가 앞으로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더 높아질 것이란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총재, 제이콥 루 전 미국 재무장관(왼쪽부터)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총재, 제이콥 루 전 미국 재무장관(왼쪽부터)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미국 금리 인상은 완만하게 이뤄질 듯

미국의 올해 물가상승률은 연준의 목표치인 2%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통화 긴축 정책이 물가 상승 흐름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 물론 미국의 정책 금리 인상은 미 연준 역사상 가장 점진적이며 완만한 ‘정상화’ 과정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달러화 강세로 경쟁국의 수입품 가격이 하락하게 되면  물가 상승은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다.

이는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2017년 경제 전망이 정확하다면, 올해는 선진국 경제가 10년 만에 디플레이션을 탈피하는 해가 될 것이다. 이로써 역사적인 통화 확장 정책의 결과가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일본 및 유로존의 통화 가치 절하가 촉매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올해 글로벌 경제가 10년 만에 디플레이션을 탈피한다 해도, 대부분의 선진국 중앙은행이 크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진국 경제는 지난 10여년 동안(일본은 이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물가 하방 압력에 시달려 왔다.

또한 이미 일부 학술 및 정책 분야에서는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연 4%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높이면 자연 금리가 높아지고, 이 덕분에 향후 또 다른 경기 침체가 도래했을 때 각국 중앙은행들이 정책 금리를 낮출 수 있는 여지가 더 생긴다는 논리다.

물론 이 밖에도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높여 잡을 수밖에 없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중앙은행도 이에 대해서 공개적으로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적당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지난 15년 동안 선진국 경제에 누적된 공공 및 개인 부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카르멘 라인하트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베어스턴스 투자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피터슨 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