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 경기는 스페인 세비야 축제의 꽃이다.
투우 경기는 스페인 세비야 축제의 꽃이다.

투우·플라멩코·오페라로 대변되는 에스파냐(스페인)의 도시는 어딜까. 맞다. 짐작대로 에스파냐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Sevilla)다. 북쪽에는 시에라모레나 산맥이 있고, 남쪽은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하며, 서쪽은 포르투갈에 접하고 있다. 1년 내내 태양이 가득해 세비야 사람들은 남부지방 특유의 밝고 깨끗한 기질을 갖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안달루시아로 가는 스페인 국도 4번에는 양쪽으로 드넓은 올리브밭이 펼쳐져 있어 태양과 정열의 도시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 지역 올리브 수확량은 세계 1위다. 세비야는 올리브와 더불어 포도, 셰리주(스페인 전통 와인), 담배, 섬유를 수출한다. 역사적으로 로마, 이슬람의 오랜 통치 기간을 거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


투우·콜롬버스 등 오페라 소재 넘쳐

대표적인 유산은 세비야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1520년 건설됐다. 8세기 무렵 세워진 이슬람교의 예배당 ‘모스크’를 부수고 고딕양식의 웅장하면서도 기품 있는 이 성당을 세운 것이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을 지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첨탑만큼은 남겨뒀다. 바로 히랄다탑으로 이름에서 이슬람의 체취가 느껴진다. 대성당을 통해 탑 끝까지 올라가면 세비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세비야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은 시기의 유산과 이슬람·기독교 지배세력의 대립·갈등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한편으론 그런 이유로 우아하고 화려하다. 25개나 되는 오페라의 배경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슬람 문명 때의 왕궁 알카사르, 담배공장, 투우, 콜럼버스 등 작품의 소재 거리가 차고 넘친다.

특히 16세기의 세비야는 문화·정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기 때문에 작가와 작곡가들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도시 세비야에 관심이 많았다. 잘 알려진 ‘세비야의 이발사’를 비롯해 카르멘, 돈 조반니, 운명의 힘, 라 파보리타 등 25개나 되는 오페라가 세비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이발사 피가로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피가로는 같은 인물이다. 이 두 오페라의 원작은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Pierre 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의 피가로 3부작이다. 그중 1부는 로시니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로, 2부는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으로 만들었다. 내용상 전개로는 세비야의 이발사인 피가로가 먼저 알마비바 백작을 결혼시키고, 피가로의 결혼에서 자신이 수잔나와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로시니보다 먼저 태어난 모차르트는 피가로 3부작 중에서 2부를 골라 오페라로 무대에 올렸고(1786년 초연) 뒤이어 로시니가 1부를 무대에 올렸다(1816년 초연). 어쨌든 모차르트와 로시니 둘 다 각각의 오페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자리매김했고 이 두 오페라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오페라 부파(희극적인 오페라)로 꼽힌다.

세비야에 가면 오페라 속 등장인물 수잔나의 집도 볼 수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도 좋지만 단연 으뜸은 ‘카르멘’이다. 프랑스 작곡가 비제(Georges Bizet)가 작곡한 카르멘은 모든 오페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재미있다. 내용이야 사랑과 유혹에 관한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전까지의 오페라가 귀족과 왕, 신화를 소재로 했다면 카르멘은 귀족이 아닌 평민을, 그것도 가장 천대받는 밑바닥 출신 ‘집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집시와 그들이 추는 플라멩코, 사랑의 대상인 투우사, 이 오페라 하나만 봐도 에스파냐와 세비야의 깊숙한 내면까지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집시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인도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인더스 강 중류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이들은 페르시아·터키·그리스에서 악사, 대장장이 등을 하며 지냈고 14세기 중엽부터 파리·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에스파냐로의 긴 순례를 떠났고 마침내 안달루시아 지방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은 정착하는 대신 유랑을 하며 전 유럽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옷차림도 이상했다. 점을 치고 묘기를 부리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에스파냐에서는 이들에게 귀 자르기, 매질 등 엄청난 형벌을 가하고 모진 괄시를 퍼부었다. 오랜 방랑 세월과 탄압 속에서 견디면서 맺힌 한과 슬픔을 집시들은 노래와 춤으로 승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플라멩코다.


오페라 ‘카르멘’의 1896년 미국 공연 포스터.
오페라 ‘카르멘’의 1896년 미국 공연 포스터.

탄압당한 집시의 ‘한’ 승화시킨 플라멩코

플라멩코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19세기 초까지도 집시들의 거주지인 동굴에서 노래에다 손뼉 치기, 손가락 튕기기 등을 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동굴을 벗어나 본격적인 무대로 나가게 된다. 기타 반주에 무용까지 곁들여지면서 요즘의 플라멩코는 칸테(노래)·토케(기타 연주)·바일레(춤)의 구성으로 완벽하게 균형 잡혔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속 음악이 집시의 깊은 슬픔과 합쳐지면서 관능과 심오함이 버무려진 스페인의 대표적인 예술이 됐다.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무겁고 깊이가 있다.

그럼 왜 이 떠돌이 집시들이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해 이런 예술을 발전시켰을까.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안달루시아인은 순간적이고 영구적이고 비이성적이어도 모든 창조적 충동을 포용하고 그 결과로 생기는 기묘한 조화를 즐긴다고. 그래서 기질적으로 집시들에게 공감했고, 그들의 자유로운 삶에서 안달루시아인 본연의 모습을 느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이다.

투우도 이런 면에선 같은 맥락이다.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하면 한이 없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는 투우를 금지했다. 하지만 아직도 에스파냐에선 투우를 그들의 얼이자 삶의 본질을 다루는 정신으로 보고 있다. 인간 중 가장 남성성이 두드러진 투우사와 수소의 한판 승부. 투우사는 2마리의 수소를 상대하며 원칙적으로 땅에서 발을 떼지 않으며 소를 공격한다. 투우사가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이 한판 승부는 인간 삶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한다. 수소의 숨골에 정확하게 창을 내리꽂아 승리하게 되는 순간, 이 순간을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서 싸워나간다. 이 의식은 바로 투우의 본고장 세비야의 또 다른 정체성을 보여준다.


▒ 박현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석사, 고려대 문화콘텐츠 전공 박사,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등 공연 콘텐츠 제작


keyword

오페라 부파(opera buffa)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뜻하는 ‘오페라 세리아’와 대립하는 말로, 희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말한다. 초기의 베네치아 오페라에서는 막간에 익살스러운 내용의 짧은 연극을 넣고 ‘인테르메초(막간극)’라고 했다. 이것이 인기를 얻어 그 뒤 나폴리 시대에는 독립된 오페라가 돼 오페라 부파로 불렸다.